“재일조선인은 일제 강점기 일본 사회에 뿌리 내린 일본 사회 구성원인과 동시에 한반도의 두 나라하고도 때려야 땔 수없는 인연을 가진 존재이다. 재일조선인의 ‘어중간함’은 그러한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성격에서 비롯되고, 그런 존재로서 받아들여져 마땅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있는 그대로 재일조선인의 삶과 뜻을 받아들여질 만큼 다원적으로 열린사회가 될 것을 염원하며, 이 책이 재일조선인을 조금이라도 깊이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8·15 광복 71주년을 맞아, 여전히 식민 지배의 멍에를 지고 고난과 희망을 이어 온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신간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는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근대사 전문가인 미즈노 나오키 교수와 재일 2세 학자인 문경수 교수가 집필한 재일조선인의 사회사이다. 신문, 잡지, 기록물 등 다양한 사료를 바턍으로 한 이 책은 역사학뿐 아니라 문화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문화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축적된 다양한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이 땅에서 흔히 재일동포라고 부르는 재일조선인. 아주 낯선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잘 모른다. 그래서 더욱 ‘우리’ 관점으로만 ‘그들’을 바라보고 한국사의 바깥에 있는 역사의 피해자로만 여겨 온 게 사실이다. 3세, 4세까지 이어 오며 대대로 살아온 일본 땅에서는 “너희 나라로 가라!” “죽여라!” 같은 험악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가 난무하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 사회의 우익화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관계를 우려하는 가운데 이와나미신서로 기획된 책이기도 하다.
그동안 일본과 남북 어디에서도 환대받지도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고난 속에서 살아온 ‘역사의 수난자’로만 그려진 재일조선인은 이 책에서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 국민국가의 틀을 돌파하는 미래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동아시아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이념과 국가주의의 족쇄 속에서도, 그들 나름으로 일터와 생활공간에서 교육과 문화를 꽃피우며 정체성을 또렷하게 형성해 왔다.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온 역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실 한국근현대사에서 재일조선인의 활약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식민지 억압을 뚫고 전 민족적인 독립의 함성을 외친 3·1운동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도화선이 되었다. 1927년에는 일본 땅에도 신간회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조선인들은 1920년대 일본 노동운동과 일본공산당의 강력한 기반 세력으로 활약했다. 간토대지진 이후 아나키스트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서슬 퍼런 천황제에 정면으로 맞서 청춘을 불살랐고, 조선인 공산주의자 김천해는 당당히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 강점기의 산물이자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일 관계의 쟁점인 강제징용 과정과,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일본 정부의 공식 기록을 포함한 1차사료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다.
강점 이후부터 직업소개소, 청부업자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를 집단으로 모집하여 남성은 토목건설이나 탄광에, 여성은 방직공장, 염색공장에 고용했다. 이렇게 해서 먼저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은 고향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일자리를 소개함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요즘 나타나는 이주노동자의 ‘연쇄 이주’와 다를 바 없는 형태였다. 조선인의 직업은 점차 농촌의 머슴, 토사 채취, 노점과 행상, 짐꾼, 공사장 잡부, 가사 도우미로 확대되었고,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저임금 노동자로서 일본 경제의 최하층을 이루었다. 그래서 1910년 2,600명이던 일본 거주 조선인 인구는 1930년에 50만 명, 1945년에는 무려 200만 명을 넘게 된다.
대도시 외곽 하천 부지나 일터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에 하나둘 세워진 판잣집은 ‘불법 건축’이라 해서 퇴거 압박에 시달렸으며, 강제 철거되는 경우도 많았다. 상하수도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생활 터전이나 음식점과 잡화점에서부터 시장과 학교가 생겨나 점차 조선인 마을을 이루었다. 교토 근교의 우토로 마을과 오사카의 ‘이카이노’(猪飼野), 도쿄의 오쿠보를 비롯하여 거의 일본 전역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 집단거주 지역은 이런 역사의 산물이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육, 문화, 스포츠에서 일상생활까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의 마치코바, 함바, 노동하숙에서 이어 가는 고단한 삶은 물론 다문화 공생이 화두인 오늘날까지 교육과 취업, 복지 혜택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현실, 그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고 일부 풀뿌리 지방자치체나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일본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모습도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946년 문화종합잡지 《민주조선》 창간을 시작으로 창간호 1만6천 부를 인쇄한 《계간 삼천리》(1975년 창간), 《계간 청구》(1989년 창간), 여성문예지 《봉선화》(1991년 창간) 등 끊임없이 다양한 매체를 발간하며 수준 높은 문화를 이끌어 갔다. 김사량을 비롯하여 김달수, 김석범, 김시종, 이회성, 최근의 유미리까지 재일조선인 작가들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진희, 강재언, 강덕상 등이 고대사와 근현대사 연구로 한국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먹계의 전설 최영의(최배달), 스모와 프로레슬링을 석권한 김신락(역도산)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3번타자로서, 감독까지 겸임하며 일본 야구 신기록을 갈아치운 이팔용(후지모토 히데오)의 활약상은 이 책이 거의 처음 소개하는 ‘특종’ 가운데 하나이다. 30여 점의 풍부한 사진 자료와 통계자료를 분석하여 정리한 7점의 도표는 생생한 과거의 모습과 실태를 더 신뢰감 있게 입증해 준다.
이렇듯 다채롭고 역동적인 100년을 살아오면서 민족과 국적이라는 국민국가의 틀과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만의 개성 강한 정체성을 만들어 온 역사는 글로벌 시대의 다양한 쟁점과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오롯이 담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일상생활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이 책을 찬찬히 읽고 나면, 옮긴이의 말처럼 “뜻밖에 한국사회와 남북한, 나아가 동아시아 현대사를 이제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눈으로 보는 인식상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