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는 토끼굴 같은 사무실에서 몇십 년을 보낸 수많은 직장인들이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 대한 이야기이다.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린 사람들, 정리 해고와 일터 괴롭힘의 피해자들, 학교 폭력과 왕따의 피해자들, 스트레스 엔진이 되어 버린 직장과 학교를 없애 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조용하고 친절하던 직장 동료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타나 하나씩 동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또 얌전하기만 하던 학교 친구가 어느날 총과 폭탄을 들고 나타나 학교를 피바다로 만든다.
그간 이와 같은 사건들은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만의 이야기로 여겨지거나 사이코패스나 정신병자의 묻지마 살인, 혹은 인종주의자 등의 혐오 범죄라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주인공들의 삶을 추적해 나가면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한다.
이들이 대부분은 집에서나 사회에서나 평범하고 정상적이라 여겨지던 친구들이었다는 것, 직장과 학교에서 학대당했다는 것, 그리고 실은 무작위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자신을 괴롭힌 억압자와 회사, 학교 그 자체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타의 범죄와 이를 구분해 주는 것은 이들에 대해 동조하거나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살인자 개인의 머릿속이나 정신 상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삶의 무대에 주목한 저자는 직장 내 분노 살인과 학내 총격 사건이 실은 하나로 연결된 현상이며, 잔혹한 경쟁 문화와 무차별적인 해고가 일상화된 레이거노믹스 이후에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학교 폭력과 일터 괴롭힘이 만연한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장과도 같은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모멸적이고 굴욕적인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주요한 두 삶의 무대, 즉 직장과 학교를 어떻게 파괴해 갔는지 보여 준다.
책 속으로“최저의 비용으로 최대의 노동을 얻어 내기 위해서 농장주는 노예들에게 위생적인 오두막을 지어 주고, 건강에 좋은 충분한 음식과 적절한 의복을 제공하며, 여가를 허락하고, 아플 때는 치료해 줘야 했다. [……] 또 자신과 노예 사이의 엄청난 사회적 거리도 유지해야 했다.
“농장주”를 “사용자”로, “노예”를 “직원”으로 바꾸면 위 구절이 어떻게 읽히는지 보라.
어느 쪽이 더 충격적인지 말하기란 쉽지 않다. 섬뜩하게 보이던 어제의 노예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비칠까. 기이하게도 그들이, 이론상으로는, 얼핏 인도적으로도 보인다. 사실, 오늘날 복지 혜택을 대폭 삭감하는 사용자들은, 적어도 수사적으로는, 노예 소유주들과 비교해 직원들에게 훨씬 더 잔인하다. (74쪽)
분노 살인 현상 전반이 우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미국에서 직원 규모로는 두 번째로 큰, 80만 명에 이르는 직원을 거느린 공기업으로 가장 먼저 탈규제ㆍ민영화 조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보수주의 성향의 미국기업연구소는 이 조치를 “연방 기관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구조 조정”이라 불렀다. (147쪽)
클린턴 정부에서 이루어진 규제 완화로 월가는 더욱 번창했고, 지구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었으며, 정리 해고가 급증했고, 레이건이 개시한 반노동ㆍ친주주 기업 문화는 급진적 실험에서 삶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2001년에] 조지 W. 부시가 취임할 무렵에는 문화ㆍ경제적 변형이 깊숙이 자리 잡아서, 한때 극단적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환호와 찬양을 받았는데, 심지어는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도 그러했다. 그 변화는 급진적이고 트라우마적이었다. 그러니까 역사학자들이 이 시대를 뒤돌아볼 때 어째서 살인 사건과 반란이 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의아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예 반란이 그토록 적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충격적인 것처럼 말이다.(171쪽)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84시간 늘어났다. 급여는 같거나 줄었는데, 근무일은 4주 반가량 늘어난 셈이다. 또 미국인들은 같은 일을 하는 유럽인들보다 한 해 350시간 더 일한다.... 노동시간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로 치솟는 동안 부시 대통령은 2004년 여름, 기업들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겨 주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초과근무 수당이라는 전통적 권리를 박탈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한 것이다. 미국인들이 사무실에서 미친 듯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이 사용하는 물리적 공간도 줄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딱 10년 사이에 업무 공간의 평균 크기가 25~50퍼센트가량 줄었다. 3천5백만 명이 칸막이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는 “끊임없는 감시 메커니즘”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또한 죄다 똑같은, 이 모욕적인 벌집 구조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독립된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 감독자들에 견줘 자신들이 얼마나 낮은 위치에 있는지 단단히 상기시키도록 만들어졌다.(189쪽)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음을 고려할 때, 반란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무모할 정도의 용기나, 정신 질환 혹은 자살을 각오한 자포자기 상태가 필요하다.(231쪽)
최근 기업들은 '정리 해고 분노'에 직면해 있다. 예컨대, 정리 해고로 일자리를 잃게 된 어느 IT 회사의 전 관리자는 회사의 컴퓨터 시스템들을 훼손해 회사 주식 공매 전날에 2천만 달러의 손해를 입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익명의 쪽지를 남겼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좋을 때건 나쁠 때건 회사에 충성했다. 나는 최고 경영진 가운데 한 사람이 고상한 자기 사무실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며 정리 해고를 통보할 거라 생각했다. 구내식당 책임자가 경비원들을 대동하고 와서는, 우리가 범죄자인 양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232쪽)
아들의 살해 행위는 괴물 같았지만 아들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274쪽)
처음에 사람들은 콜럼바인의 딜런 클리볼드와 에릭 해리스가 약에 절어 정신이 이상해진 중퇴자, 나치에 열광하는 동성애자, 붕괴된 가정의 자녀, 고스족, 트렌치코트 마피아, 마릴린 맨슨을 좋아하는 깡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은 훨씬 더 평범하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저지른 학살과 관련해 참 혼란스러운 점이었다. 둘 다 양친이 모두 살아 있었고 부모에게서 사랑 받았으며 대단히 똑똑했지만 엉뚱한 학생이었다. 그들은 나치나 약물 중독자가 아니었다. 고스족도 트렌치코트 마피아도 마릴린 맨슨을 따르는 패거리도 아니었다. 또 일부 생각과는 달리 게이도 아니었다.(301쪽)
프로파일링 해야 하는 것은 사무실이나 학교의 총격자들이 아니다 ― 그런 프로필은 만들 수도 없다. 정작 프로파일링을 해야 할 대상은 직장과 학교다.(302쪽)
앤디가 학교에서 총을 쏠 계획을 한 건 적어도 며칠 전부터였다. 사실 그는 죽이고 싶은 건지, 죽고 싶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갈팡질팡했다. (330쪽)
레이건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나라가 점점 계급과 인종을 따라 양극화되면서 중산층은 도심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에 무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꼭 육체노동자 노조가 분쇄되고 정부가 빈민 지원금을 삭감할 때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체로 도심 학교 폭력은 “저들의” 문제로 간주됐다. 레이건 정부에서 가난에 대한 책임이 빈민 자신에게 돌아갔듯이, 학교 갱 폭력의 책임은 폭력이 가장 심각한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라틴계에게로 돌아갔다. .... 어느 누구도 백인 중산층 학교에서 분노 살인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일은 1990년대 말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359쪽)
미국인들은 그 학살에 대해 콜럼바인 고등학교를 제외한 모든 것 ― 즉 폭력적인 미디어, 마릴린 맨슨, 고스 문화, 인터넷, 트렌치코트 마피아, 비디오 게임, 느슨한 총기 규제법, 자유주의적 가치들 ― 을 탓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여전히 학교는 묵과한 채 정반대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이 두 소년이 도덕적ㆍ정신적으로 병들어서 그렇다고도 했고, 동성애 성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마치 그들이 예외적인 별종이고 그들만 없었다면 학교는 행복한 아이들만의 학교였을 거라는 듯 말이다.
그들은 동기를 찾고자 온 세계를 샅샅이 뒤졌다. 단 한 곳, 다름 아닌 범죄 현장만 빼고. 사실 해리스와 클리볼드에게 학교에서 보내는 보통의 하루는 지옥이었다. (369쪽)
콜럼바인 살인 사건 5년 뒤 딜런의 어머니 수전 클리볼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죽기 전에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것 같아요. 이를 알아채지 못한 저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375쪽)
레이건 혁명의 여파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부모들을 몰아붙인 것처럼 아이들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한 번 실수해 낙오하면 ― 심지어 유아원에서라도 ― 평생이 끝장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441쪽)
“1,300점 혹은 믿을 수 없는 점수인 1,350점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비리그나 버클리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요.”(442쪽)
사실 부정행위는 오늘날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 그 모든 “기업의 불법행위” 스캔들에서 보았듯 부정행위자들이 승리한다. (443쪽)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감당해야 하는 극히 이례적인 학업 환경은 새러토가 고등학교 교사 및 당국자들이 조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든 것은 탈규제화된 자유 시장이다. 경쟁은 지구적이고 강렬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런 인식이 퍼졌다. ‘캘이나 MIT, 하버드에 들어가서 초협대역 기술을 개발해야지. 그러지 못하면 다리 밑에서 다람쥐를 구워 먹는 신세가 되고 말 거야.’”(456쪽)
온 나라가 이런 비열함과 냉담함으로 들끓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직 미친 사람들만이 그것이 잘못됐다고 ― “정상적”인 것이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라고 ― 느끼고 그중 일부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운다. (4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