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근의 두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이 출간되었다.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류근이 등단 이후 18년 동안 “시로부터 도망다닌 것처럼 보이는 세월에 대한 비밀”이 이번 시집 속 72편의 시들에 숨어 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시인은 첫 시집 출간 후 6년이라는 시간만큼 차곡이 쌓인 상처를 다시 진솔한 언어로 매만지며 돌아보는 한편, 아물지 않는 그 상처와 ‘어떻게든 이별’하려는 결심을 거듭하여 시도하고 있다.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하였다
―「어떻게든 이별」 부분
자아와 세계에 대한 모호하고 거창한 탐구, 관념적이고 아카데믹한 탐구에 류근은 관심이 없다. 우리의 일상성을 넘어서는 문제, 지나치게 진지하고 고매하여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문제는 류근의 관심사가 아니다. 류근의 관심사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연애, 추억, 음주, 가족, 육체 등과 관련된 일상적 사건이나 생각 들이다. 류근은 그런 것들을 입가에 웃음기가 피어오르게 만드는 어법으로, 객쩍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의 솔직함으로 우리 앞에 털어놓는다. 그래서 류근의 시는 철조망이 쳐진 개인의 사유지처럼 우리의 접근을 거부하는 느낌이 아니라 사방이 트인 공원처럼 우리의 산책을 반기는 느낌을 준다._홍정선(문학평론가)
“잊혀진다는 건/좋은 일이다”(「명왕성 이후」). 망각이라는 귀중한 능력 덕분에, 보통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은 풍화하여 흔적만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어떤 기억이 있다. 내내 지워지지 않고, 합리화로도 아름다워질 수 없는 기억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오래 앓을 수밖에 없다. 모두의 마음 밑바닥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기억, 류근의 이번 시집에는 그런 상흔 같은 기억을 되새기는 시들이 유독 많다.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으며(「휴가병」),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는”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를 “버릴 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낱말 하나 사전」).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매달려” 살던 적도 있었다.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데 욕망은 턱없이 집요했다. “팔리지 않으나/너무 많이 상영되어버린 영화”(「영화로운 나날」) 같은 자신이 환멸스러워 술도 자주 마셨다.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지던 것이다(「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그런 때에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시들이 많은데, 고(故) 김광석의 노래로 널리 불리는 초기 시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토로하던 류근 시의 화자는 긴 세월 상처로 남은 애인, 애인들에게 어느덧 “결별의 말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당신을 만나 “남김없이 불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제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제 기억과 상처에게도 전하는 인사일 것이다. “가족에게 비겁했고, 가족 때문에 비겁했다. 애인에게 비겁했고, 애인 때문에 비겁했다. 시 때문에 비겁했고 시에게 비겁했다”(홍정선). 모든 비겁함에 이별을 고하며, 겪어온 어떤 상처보다 더 쓰라릴 ‘고독’을 화자는 견딜 수 있을까. “내게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일없이 왔다 가는 밤과 낮이 아프다”(「고독의 근육」).
이렇게 지극한 고독과 깊은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시가 버겁지 않은 건 류근이 지닌 자질 덕분일 것이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가장 진지하고도 가장 가볍게 타자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스며드는 일종의 방법적 사랑”(최현식)이라는 의미에서의 통속미(通俗美)는 이번 시집에서도 유효한데, 한없이 무거운 기억 속 상처와 애절한 감정을 안기는 주변의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 속에 홀로 빠져들어 고립되지 않고 무리 없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꽉 찬 성찰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언하기보다 짐작하고, 선언하기보다 기원하면서, 성찰은 시인에 의해 쉽고 친숙한 언어들로 정제되어 시로 탄생한다.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 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시인들」 전문
책 속으로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낱말 하나 사전」 전문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버린 영화였다
―「영화로운 나날」 부분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
내가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숙취와 악취를 지병처럼 앓고 살 때
[......]
나는 또 누군가에게 빨리 들켜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진다 평화롭게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적군을 향해서
나는 나의 순결한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가
비틀거리며 돌아올 때마다 더 수직으로 빛나는
세상이여 나는 왜 이렇게 너희와 다른가
이렇게 닮지 않으려
몸을 비틀어야만 하는 건가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