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세번째 시집 '유에서 유'가 출간되었다.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거침없는 폭로와 상처, 어둠, 쓸쓸함 등의 감정을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중첩되는 단어와 시구 들이 밀어붙이는 리듬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된다.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놀이”(권혁웅, 문학평론가)이기에 오은, 그의 말놀이는 한가로운 피크닉 장소에 떨어진 폭탄처럼 평온함을 뒤엎고 전에 없던 흥겨움을 터뜨린다. 말놀이로 일궈낸 신나는 한 판이 오은의 시어들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만 중요했다
―「서바이벌」 부분
오은은 현 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쓸쓸함과 불안감의 실체를 ‘서바이벌’에 빗대어 드러낸다. “살다의 반대말은 죽다가 아니야/떨어지다지”라는 시인의 시구처럼, 한국은 살아남거나 혹은 떨어지는 사회로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누군가는 떨어졌다는” 뜻과도 연결된다. 오은은 “우리” “너” “나” “하나”와 같이 가볍고도 흔한 단어들로, ‘내가 살고, 너는 떨어진다’는 사회의 이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리’가 사라지고 ‘하나’만이 남는다는 서바이벌의 규칙을 한국 사회에 접목시킨다.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다.
[……]
시간은
빛이 달아나는 속도처럼 빠르거나
빚이 불어나는 속도처럼 더 빨랐다
졸업 직전, 친구 중 하나가 휴학했다
졸업 직후, 친구 중 하나가 대학원에 갔다
―「졸업 시즌」 부분
“빛”이 나야 할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에 처박히고, “빛”이 아닌 “빚”이 늘어난다. “졸업 직전”과 “졸업 직후”는 전/후의 큰 차이지만, 다시 학교라는 곳에 발붙인다는 점에서 차이는 쉽게 상쇄되어버린다. 오은은 ‘빛/빚’ ‘아/어나는 속도처럼’ ‘졸업 직전/후’ ‘친구 중 하나가’ 등 단어의 형태상 차이가 크지 않은 단어들을 배치하면서 의미상의 차이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 표면에 나타난 형태와 다른 이면의 아픈 지점이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 시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지점은 시인이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넘어가는 어떤 시기를 다시 졸업 직전과 직후로 나누며 세밀하게 나누고 그의 언어로 박아놓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은은 한 인터뷰에서 ‘시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각자의 말로, 우리의 말로 기억하는 것’이 시가 가지는 최소한의 역할이라 말한 적이 있다. 언어가 가진 세밀한 차이를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시인인 만큼 상황을 세세히 나누고, 그를 함께 짊어지는 태도 또한 그의 시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오은의 지난 시집들에서 주목받은 ‘말놀이’의 특징들, 그 유희의 측면이 이번 시집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 대해, 너에 대해
내가 너에게 더 가까워지려는 찰나에 대해
너무에 대해, 너무가 갖는 너무함에 대해, 너무가
한쪽 팔을 벌려 나무가 되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비
로소 생장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순간에 대해, 너
무가 세상을 향해 팔 뻗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품은
부정적 의미는 사라져
―「너무」 부분
‘너무’와 ‘나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만 오은의 시 세계에서 ‘나무’는 ‘너무’가 한쪽 팔을 벌린 모양새다. ‘ㅓ’가 팔을 뻗어 ‘ㅏ’가 되었을 때 ‘너무’가 갖고 있던 부정적 의미는 나무의 가지가 뻗어갈 때의 생동감과 힘찬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비로소 ‘너무’의 부정성은 사라진다. 사소한 변주만으로 언어 형태의 부정성을 끌어안고 나아가 의미를 전복시키는 오은 시의 힘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너에게 반을 줄게
나는 나머지 반을 가지면 되니까
나는 반과 반을 합치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
나에겐 아직도 반이 남아 있단다
나는 반의반을 떼어주었다
네가 그것을 떼어먹을 것을 알면서도
반에 반했다가
반에 반(反)해버리듯이
―「반의반」 부분
「반의반」에서는 하나의 ‘반’과 또 다른 ‘반’을 나누고, 그 반들을 가지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반’ 다음에 “반나절”이 오고, 그다음에 “반의반”이 오고, 또 그다음에 ‘반하다’가 오는 식의 사전식 배열은 처음 ‘반’에서 시작한 그의 말놀이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오은은 ‘반’이라는 일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고, ‘반’ 위에 확장된 의미의 ‘반’들을 쌓고, 중첩시키면서 상투적인 맥락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반’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어둡고 쓸쓸한 풍경을 떠도는 언어들의 놀이, 언어들의 유희는 결국에 이 시들이 모두 오은의 시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