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시인의 '시 읽기의 즐거움―나의 한국 현대시 읽기'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긴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선후배 시인들의 시를 읽고 벗해온 시인이 진솔하고 다정하게 써내려간 시와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기록이다.
1부는 시인이 열과 성을 다해 배우고 즐겨온 선배 세대의 시를 깊이 읽어낸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멀리는 백석에서 청록파의 박목월 조지훈을 거쳐 신경림 고은 김지하 김수영 김종삼까지 시인과 함께 따라 읽다보면 시를 즐기는 다채로운 방식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시의 리듬에 주의하며 호흡을 따라 읽어보는 것이 그중 하나다. 실제로 시인은 이 책 도처에서 리듬(호흡과 율격)을 시 감상의 중요한 포인트로 잡아 시를 읽어가는데, 특히 신경림 시인이 민요의 율격을 현대시에 접목하려 애쓰던 시절의 절창 「목계장터」의 음악적 구조를 밝힌 글이 그렇다. 시인은 「목계장터」가 음절 수를 기계적으로 맞추지 않지만 그것이 운율의 파탄의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리듬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들어올리고 있는 4음보 율격의 탁월한 현재적 가치”(23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하나의 방식은 시사(詩史)의 맥락 속에서 시를 읽는 것이다. 신경림과 김지하, 김종삼의 시를 그 선배-동료 시인들의 시세계와 비교하며 읽다보면 그것이 왜, 어떤 지점에서 탄생한 새로운 감수성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시사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의 선후를 따르지 않는다. 새로운 시의 출현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해석을 따를 뿐이다. 신경림의 「겨울밤」(1965년작)과 신동엽의 「종로5가」(1967년작)를 비교하며 「종로5가」의 60년대적 한계를 짚고 「겨울밤」에서 다가올 새로운 세력으로서 ‘민중’의 활기를 읽어내는 예리함은 시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 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일깨워준다.
그러나 시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 읽기의 자세는 시 자체에 즉(卽)하는 것이다. 일체의 관념과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 읽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실감으로 시에 선뜻 다가서는 것, 자신만의 시 읽기는 거기서 비롯된다. 그것이 김수영과 백석, 고은 시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꽃잎 1」에 대하여: 임홍배의 해석에 대한 짧은 반론」 「백석 시 다시 읽기: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에 대한 촌평」 「고은의 『만인보』가 이룬 것과 잃은 것」 세편의 글은 이들 시인에 대해 시인이 제시하는 ‘다른’ 해석이자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식적인 전언을 읽기 위해 시를 읽지는 않는다. (…) 작품이 주는 전언보다도 교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과잉해석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훼손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살아 있는 작품을 만나는 일이며, 매순간 나의 살아 있는 날호흡으로 그것들과 열렬하게 부딪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다.(38면)
이런 생생한 시 읽기는 예리한 감식안과 함께 냉정한 판단력을 갖출 때 빛을 발한다. 흔히 대작으로만 두루뭉술하게 상찬되는 고은 『만인보』의 타작과 수작을 꼼꼼히 가려 읽고, 기존 해석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한국시사에서 그 작업의 의미를 짚어낸 글은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실한 탐구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2부는 200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금요일의 문학이야기’에서 청중과 함께 읽은 시집들이 주를 이룬다. 장철문 안도현 나희덕 박형준 김행숙 등 모두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인들의 신작시집 가운데 한두편을 골라 어떤 면이 놀라운지, 그 시가 왜 좋다고 생각하는지를 친절하게 풀어주고 있다. 때로는 리듬에, 때로는 시어에, 때로는 풍경과 대상을 구현하는 상상력에 감응하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분석하기보다 그저 “감각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에서 시인이 생각하는 ‘좋은 시’를 그려볼 수 있다. “언어가 살아 있는 사물의 본모습에 육박했을 때의 싱싱한 기운”(131면) “연속되는 2음보의 끊어치는 듯한 경쾌한 율동의 흐름”(129면) “정말이지 ‘그녀가 하는 생각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시를 감각하면서 시간이 ‘끄덕끄덕 (…)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160면) 같은 표현은 그가 시의 다채로운 특장을 얼마나 섬세하게 읽어내는지를 보여준다.
그 섬세한 애정은 또한 풍부한 식견을 바탕으로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가려내고, 세간의 평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인 안목을 드러낸다. 남과 ‘다른 눈’으로 그 시(집)의 가장 깊은 곳을 보아내는 눈길은 깊은 애정과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애정은 시 자체, 시의 리듬과 언어의 미묘한 아름다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시적 수사를 거부”하는 정규화 시의 처연한 “대목을 읽었을 땐 내 가슴도 그만 그의 가슴처럼 시큰했다는 것만 여기 적어두기로 합니다.”(184면)라고 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에 대한 깊은 공명에도 그 애정은 닿아 있다.
3부에는 또한 1970,80년대의 격동기 한국문학운동에 앞장서 참여해온 문인-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증언하는 험난한 여정, 그 시절을 함께 견뎌온 선후배·동료 문인들에 대한 정겨운 뒷얘기를 적은 글들이 쏠쏠한 재미를 준다. 24년간 남의 시를 가려 읽고 선택해야 하는 ‘창비시선’ 편집자로서 지녔던 고뇌와 자부심, 고교 은사의 시를 돌려드려야 했던 곤혹, 김지하 시집과 관련해 군부독재 시절 겪은 수난의 역사가 오롯하다.
이처럼 문단사의 산 증인이자 누구보다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로서 시인은 2015년 한국문학판을 뒤흔든 표절 논란과 그로 인해 촉발된 문학권력 논쟁의 와중에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진지한 예술가는 늘 비주류」 외 4편의 글은 극단적 비난과 비현실적 쇄신안이 난무하던 가운데 객관적 시선과 독보적인 균형감각으로 표절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함께 진정한 문학의 쇄신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글들이다.
이시영의 시 읽기는 연륜과 격식을 넘어 시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좋은 시를 만나면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는 소년 같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끝없이 새로운 감각을 벼리기 위해 쉼없이 젊은 시들을 읽어내는 그 왕성함은 세계와 사람에 대한 성실한 탐구의 자세를 바탕으로 한다. 연배와 경향을 가리지 않고 좋은 시를 만나려 기꺼이 모험을 감행하고, 그렇게 만난 멋진 한 구절에 대해서는 “수십번도 더 읽었으나 물리지 않았으며 읽을 때마다 언어의 맛이 새로웠다.”라고 고백하는 이가 이시영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