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카페에서 읽은 세계사: 일상에 얽힌 사소하지만 미처 몰랐던 세계사'는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일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를 소개한다.
이 책은 먼 고대부터 가까운 과거까지, 뉴욕 한복판에서 지진으로 무너진 히말라야 산맥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세계의 역사를 훑어보고 그 역사를 오늘 우리의 삶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도록 도와준다.
커피는 한때 ‘이교도나 마시는 사탄의 음료’였으며 여자는 카페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에밀리 뒤 샤틀레라는 여성은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 남장을 해야 했다. 왕과 황제들은 사람들이 카페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것이 꼴 보기 싫어 카페 금지법을 만들기도 했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카페의 분위기는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을 촉발시켰다. 근대과학도, 벨에포크 시대의 예술도 카페에서 발전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벌거벗고 목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집에서도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 나온 것처럼 벗고 목욕하는 것은 일 년에 몇 번 허락되지 않았다. 서양의 경우, 중세 때까지만 해도 목욕을 하면 병이 옮는다고 생각해, 목욕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한밤중에 등을 켜놓고 몸에 있는 벼룩을 잡았다. 그에 비해 로마시대 황제들은 목욕탕을 권력 과시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고, 공중목욕탕에서 시민들과 함께 벌거벗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수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대기업 회장님도, 그 대기업에서 만든 편의점에서 간신히 최저시급 받으며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도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도 있는데,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뽑았다. 제비뽑기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한동안 납세 능력이 있는 백인 남성만 투표 권한이 있었다. 여성들은 건의도 해보고 서명도 받아봤지만 남성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유리창을 깨고, 쇠사슬로 몸을 묶고, 왕 앞에서 달리는 말에 뛰어들기도 했다.
반복되는 해상사고들은 거친 자연보다 인간의 이기심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세 잉글랜드 왕 헨리 1세가 선물 받은 '하얀 배'는 배의 속도를 자랑하고 싶던 선원들의 욕심,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는 탑승객들의 이기심 때문에 침몰했다. 이 사고로 왕의 후계자가 죽고, 잉글랜드는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
대항해시대 노예무역선 역시 노예라는 '상품'에 눈먼 백인 상인들 때문에 종종 침몰했는데, 상 조제호의 선원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노예들을 갑판 아래 가두고 못질을 해 그대로 대서양에 수장시켜버렸다. 타이태닉호 침몰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살린다'라는 구조 원칙에 따라 숭고한 희생이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때도 가난한 삼등실 승객은 일등실 승객보다 많이 희생되었다.
환경 재앙은 대기업의 윤리의식 문제와 강대국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4년 인도 보팔에서 일어난 참사는 미국의 석유화학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가 세운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성 가스 40톤이 누출되면서 발생했다. 즉사한 사람만 2,259명,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지금까지 2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니온 카바이드는 제대로 된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았고 책임자들은 처벌을 가볍게 피해갔다. 나이지리아의 니제르 델타 지역에서는 다국적 석유회사 셸이 원유 시추를 하고 있다. 셸은 오고니족 땅을 파헤치고 원유가 유출되는 것도 방치했다. 켄 사로위와라는 원주민 활동가가 이에 항의하자, 나이지리아 정부는 사로위와를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셸이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돈을 댔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책 속으로
커피하우스는 혁명을 잉태한 공간이기도 하다.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볼테르가 즐겨 찾았다던 르 프로코프는 1686년 문을 열었는데, 아직도 파리에서 영업 중이다. 귀족들의 폐쇄적인 살롱 문화와 달리, 누구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커피하우스는 평등과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커피하우스에서 민중을 만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개혁 의식을 키워간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은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다.
-본문 14~15쪽
목욕탕이 중요한 문화시설이 되자 황제들도 궁전에 있는 더 좋은 목욕탕을 두고 일부러 공중목욕탕에 다녔다고 한다.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신사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벽에 등을 문지르던 퇴역 군인에게 돈과 노예를 내렸다. 이 소식은 금세 퍼졌다. 다음날 시민들은 너도 나도 ‘황제가 떴다’고 알려진 목욕탕으로 향했고 황제 앞에서 벽에 등을 문질렀다. 이를 본 황제는 서로 등을 밀어주라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황제와 시민들이 함께 벗고 같은 공간에서 목욕을 할 만큼 공중목욕탕에서만큼은 신분의 차이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문 28쪽
대형 환경 참사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기름 유출도 있고, 지진도 있고, 폭발도 있다. 공통점은 영리를 위해 움직이는 기업을 정부가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업과 정부가 결탁했다는 것이다. 피해는 온전히 주민들 몫이었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힘없고 약한 이들의 짐이 되었다. 책임을 묻는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것도 비슷하다.
-본문 135쪽
혼란 속에서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자력구제를 위한 해결책을 찾게 된다. 거래를 관리해줄 중재인, 재산을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초기 마피아들이다. 경찰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지역의 부유층은 도둑을 잡기 위해 젊은이들을 모집해 사병 조직을 만들었고 이 조직이 마피아의 유래가 되었다.
-본문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