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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다

책/학술

    악셀 호네트,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다

    신간 '사회주의 재발명'

     

    오늘날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전 지구적인 불만과 분노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상상으로 전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꿈도 희망도 없는” 시대다. 왜 사회주의는 이토록 설득력을 상실하고 그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신간 '사회주의 재발명'에서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한다. 곧 “사회주의 이념이 이전의 활력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이 다시 한 번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거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호네트는 지난날의 사회주의 기획이 산업주의 정신과 문화에 갇혀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며 그 치명적 한계들을 폭로할 뿐 아니라, 그러한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 이념을 ‘재발명’해낸다.

    이제 새로 발명된 사회주의는 단순히 생산수단의 공유라는 대안적 생산양식도 아니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성과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분배 원칙도 아니다. 호네트는 사회주의가 갖는 본래의 의미인 ‘사회적 자유’라는 근본이념을 발굴하고, 이에 기반하여 경제중심주의, 노동자중심주의, 역사적 법칙주의를 넘어서 역사적 실험주의와 민주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회주의는 강력한 사회운동이었고, 모든 진보적 사상가들의 존경을 받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회주의는 지극히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도 스스로를 좌파나 사회주의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진심으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20세기에 그처럼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사회주의 이념이 어떤 연유로 21세기에 이처럼 몰락했는가? 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수수께끼다.

    호네트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재구성한다(1장). 사회주의자들이 분배 정의의 실현, 곧 경제적 평등을 요구했다는 것은 흔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단순한 경제적 평등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개혁, 혹은 혁명적 극복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프랑스 대혁명의 목표인 자유, 평등, 우애를 모두 아우르고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자유”를 기반으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은 경제적 평등이나 대안적 생산양식의 실현이라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있다는 얘기다.

    사회주의의 근본 목표와 그 역사적 수단을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호네트는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기획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사회주의 이념이 그동안 진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낸다(2장). 특히 그는 과거의 사회주의 기획이 가졌던 세 가지 태생적 결함을 냉철히 분석해낸다.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를 단지 개인적 의도를 사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만든 필연적 원인이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 제도 속에만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결과로 경쟁과 투기로 인한 사회적인 것의 해체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대항 운동이 이미 경제적 영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는 유능한 계몽과 훈련을 통해 역사적인 필연적 과정을 추진하기 위한 자기반성적 기관으로서 이 대항 운동과 연결될 수 있었다. 분명 19세기 전반부의 사회주의 대변자들은 이 모든 사회 이론적 근본 가정에 동의했다.”(76쪽)

    이처럼 경제 영역이 중심적 투쟁 영역이고,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된 대항 세력과 연계되어야 하며, 저항 운동의 필연적 승리를 역사철학적으로 예견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은 이미 그 유효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이와 같이 시대와 맞지 않는 잘못된 가정들은 사회주의를 골동품으로 취급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호네트는 사회주의의 재발명을 위해 이러한 낡은 가정들을 청산한다. 이제 사회주의는 더 이상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 주체도, 자본주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식의 역사적 필연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들은 모든 사회적 현상들이 산업적 생산을 통해 규정될 것이라고 믿는 “산업주의 정신”에 매몰되어 있을 때에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이 남긴 모순적 유산을 사회적 자유의 제도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생산적이고도 폭넓은 사상을 발전시켰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사고 형태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산업 혁명의 경험 내용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107쪽)

    그렇다면 이처럼 진부해진 사회주의 이념에 어떠한 혁신을 가함으로써 다시 한 번 사회주의 이념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호네트는 잘못된 세 가지 가정들을 간단히 삭제하거나 기각하지 않고, 이를 산업주의 정신과 분리된 차원에서 새롭게 재구성해낸다(3장, 4장). 왜냐하면 이 가정들은 실천을 추동하는 미래 지향적 주의 주장의 필수적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천적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끝없는 갱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저 폐기해야 할 유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점에서 볼 때, ‘사회적 자유’라는 근본이념으로 돌아간 사회주의는 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타율과 노동소외 극복에 대한 전망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가 인격적 영역과 민주적 의사형성이라는 다른 두 가지 영역 내에서도 강제, 영향력, 강요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이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한 사회분화 과정을 전제한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주체들이 합의를 만들어 가는 민주적 의사형성 역시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친밀성 영역에서 상호애착 관계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배려함으로써 각기 자신의 욕구와 희망을 실현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제 사회주의는 경제적 영역뿐 아니라 인격적 영역과 민주적 의사형성 영역을 비롯한 근대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사회적 종속과 배제를 단계적으로 극복하려는 역사적 경향을 대변한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산업주의 정신에서 벗어나 이처럼 근대 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현실적으로 고려하고, 역사적 법칙주의를 역사적 실험주의로 대체하고, 프롤레타리아라는 환상적 주체가 아니라 전체 시민을 자신들의 청자로 고려한다면, 사회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자기파괴 경향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고, 자본주의 자체가 산출한 특정한 계급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그러나 기존 질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그 어떤 계급의 실행력 대신에, 사회주의가 200년 전부터 최전선에서 그 성공을 위해 참여했던 사회적 진보의 전향적 자취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이 오늘날 얼마나 더 현실적인가. 그리고 생산양식만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와 정치적 공동결정 가능성 속에서도 자유 확장의 도덕적 변호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더 정확히 오늘날의 변화된 갈등의식에 상응하는 것인가.”(185~6쪽)

    이와 같이 호네트는 ‘사회주의 대 페미니즘’, 혹은 ‘사회주의 대 공화주의’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적 자유 이념을 협소하게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51쪽 이하). 오히려 호네트는 공화주의나 페미니즘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정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격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적 자유의 정신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이 운동들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방향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네트가 말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분파주의적 요소를 벗어던지고, 역사적 실험주의와 민주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여 더욱 폭넓은 차원에서 사회적 자유를 제도화하려는 사회적 운동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와 사회주의의 도래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회주의의 실현을 희망해 볼 수 있을까?

    호네트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유의 실현과 관련된 역사적 징표나 제도적 성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권 제정, 서독의 공동결정권, 최저임금제, 몬드라곤 협동조합, 캐나다의 노동자연대기금, 생산 및 소비조합, 그리고 시장 사회화를 둘러싼 논쟁들과 노동의 인간화를 위한 노동조합의 노력 등은 바로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주는 징표이자, 사회주의를 구체적 정책으로 만들려는 실험이자 탐색 과정으로 자기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진보의 전향적 자취”야말로 오늘날의 사회주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실질적 근거이자 또한 도래할 새로운 사회주의의 현실적 전제인 것이다.

    “더 이상 사회적 집단이 아니라, 제도적 성과를 사회주의의 요구가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에서 거의 모든 것이 바뀐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험적 태도를 통해 획득된 지식의 수취인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은 단순히 이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적 방향을 가리키는 제도적 개혁을 야기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규범적 능력과 힘이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주의가 오늘날 이미 자신의 목표의 조각들이 드러나는 법적 개혁이나 정신적 변화를 더 많이 되돌아보면 볼수록 더욱더 자신의 비전이 갖는 영향력을 미래에도 확신하게 될 것이다.”(139쪽)

    책 속으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더 강력한 생산의 사회화가 기여해야 할 것은, 혁명을 통해 주창된 자유로부터 단순한 사적 이익추구라는 특징을 떼어버리고, 이를 강제 없는 협력이라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우애라는 또 다른 혁명의 요구와 일치시키려는 도덕적 목표였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는 시초부터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내재적 비판 운동이었으며, 이 사회의 규범적 정당화 토대였던 자유, 평등, 우애를 수용했다. 그러나 자유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따라서 강력하게 상호주관적 방향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한, 이들이 모순 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49쪽)

    사회주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항상 새로운 집단들이 지금까지 고려되지 않았던 자신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 의사소통 장애물을 허물어트리고 이에 상응하여 사회적 자유의 가능 공간을 확장하려 한다는 사실의 특수한 근대적 표현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125쪽)

    사회주의는 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타율과 노동소외 극복에 대한 전망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근대 사회가 인격적 영역과 민주적 의사형성이라는 다른 두 가지 영역 내에서도 강제, 영향력, 강요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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