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가 '밀실 편찬' 중인 역사 국정교과서는 "목차만 훑어봤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로, 집필뿐 아니라 심의 역시 졸속 진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47명의 집필진과 함께 '철통 보안'에 부쳐온 역사 국정교과서 심의위원 16명 가운데 처음으로 한 명이 본의 아니게 '복면'을 벗으면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기동(73) 원장은 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저는 국정교과서를 편찬하는 기관의 위원이자 19년전부터 위원"이라며 "역사 관련 연구소의 책임자들을 아마 자동적으로 겸직시킨 모양"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이기도 한 이 원장이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 역시 '자동 겸직' 중임을 스스로 시인한 것. 이 원장은 특히 역사 국정교과서에 대해 "저는 목차 정도만 봤다"면서 "목차 제목 정도만 쭉 보면 다 안다"고도 했다.
이 원장은 지난달말 국정감사 증언이나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국정교과서 목차만 힐끗 살펴봤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따라서 심의위원 가운데는 최고 원로급이자 권위자일 이 원장의 이같은 발언들은 국정교과서 심의가 얼마나 졸속으로, 또 요식행위로 이뤄졌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국정교과서 원고본은 지난 7월 완성돼 현재 개고본 작업중이며, 이달중 수정 보완이 끝나면 다음달말이나 12월초쯤 현장검토본이 공개된다.
이 과정에서 심의위원들은 지난 7월 29일 단 한 차례 모여, 불과 다섯 시간만에 중고교 역사교과서 심의를 모두 마쳤다. 교육부 관계자는 "심의위원들에게 미리 원고본을 주고 2주간 각자 심의하게 했다"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부실 검정 논란이 일었던 지난 2013년 교학사 교과서만 해도 '재택 개별조사' 기간인 18일 외에 열흘간의 심의 과정을 거쳤던 걸 감안하면, '날림 심의'란 비판은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집필진과 심의진조차 서로를 전혀 알 수 없는 '피라미드식 점조직' 형태로 작업이 진행되면서, 내부에서조차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기동 원장은 "(집필진으로) 37명이 동원됐다는데 누구인지는 모른다"며 "무슨 공산당 학습을 받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또 "도판 사진이 많고 해서 실제 해석하는 글은 얼마 안된다"며 "솔직히 말해 누가 써도 같은 얘기"라고 강조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정교과서 심의와 편수가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김정배 위원장은 지난달말 이 원장과 함께 출석한 국감 자리에서 "똑같은 문장이라도 집필자는 본인의 생각을 많이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개인 논문이나 책이 아닌 교과서이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게 서술돼야 한다"고 사뭇 다른 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 심의가 정말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사후 확인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교육부는 원고본을 제출하라는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의 요구에 "심의 이후 모두 회수해 폐기처분했다"면서 "별도의 회의 문서도 만든 바 없다"고 답변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기동 원장이 심의위원인지는 확인도, 부인도 해줄 수 없다"며 "다른 집필진이나 심의진 역시 현장검토본 공개 시점까지는 비공개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