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를 ‘올바름’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마도 동아시아에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라는 개념이 들어왔을 때 원래 유학儒學의 용어로서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를 의미하는 정의正義가 번역용어로 채택된 탓도 있어 보인다. 이런 전통적 관념에 치우쳐 정의를 힘과 도덕 사이의 역학관계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파악하지 못할 때, 정의는 작동하지 않는 실체 없는 것이 되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공적 현실에서 마주하는 정의의 실체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정의를 ‘힘과 도덕의 역학관계에 있는 것’, 즉 힘과 도덕의 틈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실제 우리가 마주하는 정의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것은 힘과 도덕이 서로 대결을 벌이며 형성되어온 유동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4~15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정의에 대한 갈급은 늘 있어왔다. 이는 본질적으로 권력, 평등, 분배의 문제와 직결되면서 그 속성상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난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투키디데스 시대부터 이 갈등이 표면화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 지구적으로 별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가 바로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자 김만권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호모 저스티스 - 불의의 시대에 필요한 정의의 계보학'에 따르면 정의란 한마디로 ‘힘’으로 상징되는 ‘권력’과 ‘도덕’으로 대표되는 ‘철학’의 대결에 다름 아니다. 또한 대다수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서구에서 정의의 위치를 먼저 차지했던 것은 ‘도덕’이 아니라 ‘힘’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의를 뜻했던 ‘디케Dike’는 그 자체로는 어떤 도덕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어떤 상황에 적합한 행위’를 의미했을 뿐이다. 이렇듯 이 책에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으며 밤샘토론으로도 모자랄 주요 논쟁점들이 가득하다.
저자는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에 따라 주요 철학자 11명의 사상과 주장을 소개하면서 중간 중간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현실감을 더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계보학은 우리가 당연히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실이나 개념의 역사를 추적해서, 우리가 별다른 의심 없이 품고 있는 현재의 지식에 내재된 부조리를 향해 비판적 접근의 길을 여는 방법론이다. 이 책은 인류 최초로 인간 본성을 기초로 역사를 서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투키디데스에서 시작해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 칼리클레스 등 불평등을 당연시하면서 권력자 또는 우월한 자가 정의롭다는 주장을 펼친 세 인물의 논리를 살펴본다. 이어 인류에게 철학의 빛을 선사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현자가 펼치는 도덕 우위론을 소개한다(1-3부). 4부에서는 근대 정의론의 대표주자인 홉스와 칸트를 다루고 마지막 5부에서는 효용을 우선시한 벤담과 권리를 중시한 롤스의 주장을 쉽고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로써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의’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이 책의 중심축 하나가 ‘정의’를 둘러싼 주요 정치사상이라면 다른 중심축 하나는 국내외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가장 최근까지도 뉴스의 단골소재였던 김영란법부터 ‘열정페이’와 비정규직 문제, ‘슈퍼 갑’ 횡포 문제, 황제노역 사건,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난민 문제,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검찰기소독점주의, 국가정보원 폐지 논란, 공직자 특혜 또는 비리 사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 존엄사 논란, 최저임금제, 성남시 청년배당 문제까지 국내외의 첨예한 이슈와 논란을 두루 소개하면서 독자들이 정의의 문제가 우리 실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고 스스로 판단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각종 차별과 혐오를 형성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는 제도를 하루 빨리 만드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구 국가들이 미래의 대안으로 제도적 실험에 나서고 있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칸트가 지적하듯 좋은 제도가 있다면 악마도 좋은 시민이 될 수 있으며, 롤스가 가정하듯 정의로운 제도가 정의로운 인간을 만든다.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제도적 장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차별과 혐오를 형성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데 있다. 평등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만드는 것이다. ‘평등을 만드는 일을 사회기본구조가 행하게 하라.’ 이것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정의의 자세다”(373쪽)
책 속으로
정의에서 ‘공정함’이라는 도덕적 요소가 작동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관계 당사자들 간의 평등이다. 도덕이 정의의 요소로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평등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후 인류의 역사는 불평등한 구조에서 벗어나 평등한 구조를 형성하려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그 예가 바로 민주정이다.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정체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군주정, 귀족정, 독재정, 전제정 등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인류가 만들어온 정체 속에서 통치자는 늘 소수였고, 다수는 지배받는 자의 관계에 있었다. 오로지 민주정만이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했고, 지금 현재 인류는 민주정을 유일하게 정당한 정체로 여기고 있다. (56쪽)
소크라테스는 모든 불의는 무지에서 나오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더는 새로운 앎도 추구하지 않을 때, 더 나아가 그 앎을 실천하지 않을 때 부정의가 생겨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던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도시가 불의로 기울어갈 때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략)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대답을 상상해본다. “저는 금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172쪽)
이와 함께 벤담은 입법자들과 정책가들에게 입법의 기준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리주의의 원칙,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행복과 관련될 때 더해지는 기준은 ‘범위extent’다. 이 원칙에 따르면 최대한 많은 개인이 행복해져야만 한다. 이는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쾌락과 고통을 삶의 원칙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원칙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했다. 여전히 여성을 남성의 재산으로 여기고 평민을 ‘돼지’에 비유하며 경멸하던 벤담의 시대에 이런 발상은 진정 혁명적인 것이었다. 벤담은 여성이든 청년이 든 노인이든 평민이든 귀족이든 효용의 원칙에 따라 그 누구라도 차별 없이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벤담은 모든 사람 이 1인 1표라는 동등한 투표권을 지녀야 하며, 『의회개혁에 대한 문답서Catechism of Parliamentary Reform』(1809)에서 밝히고 있듯 여성들 또한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 벤담의 이런 강력한 주장은 훗날 민주주의 확장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렇듯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그 시작에 있어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대다수와 최대 행복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는, 서로 결별할 수밖에 없는 평행선을 긋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은 공리주의를 마침내 체제 순응적인 사상으로 만들고 말았다. (305~306쪽)
롤스가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은 당대의 지배적인 행위윤리로서 공리주의 이론이 효용의 생산에만 집중할 뿐 사회가 실질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영역인 정당한 분배에 대한 해결에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롤스는 공리주의가 행복의 총량이 얼마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것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방식에 대해 간접적으로밖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만약 분배가 생산보다 더 중요한 갈등의 원인이라면 숙고된 행위윤리가 공정한 분배보다 더 많은 생산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3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