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고뇌가 없다는 것'은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의 설교 스물한 편을 묶은 것이다.
이 책은 교인들의 의식구조와 인식상의 문제를 천착한다. 회중에게 깊숙이 자리한 욕망과 콤플렉스, 목회자와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무지, 자의적인 텍스트 해석의 문제점, 빈번히 발견되는 심리적 투사와 혼돈의 현실에 대한 지적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화상’을 입힐 만한 것이다. 책은 가히 ‘무지의 현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려내는 무지몽매한 현실을 하나씩 드러내 질타한다. 여기에는 신앙의 목적에 대한 몰이해, 기복주의적이고 성공주의적인 긍정일변 신앙의 기만성, 이러한 체질이 공고화, 사회화되면서 초래된 영적 권능의 상실과 같은 것이 대표적일 텐데, 물론 이러한 무지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대형교회, 교계 원로의 발언과 퍼포먼스 등도 칼날을 피해가지 못한다. 당대의 지배세력과 불화했던 예언자들의 전통을 성실히 따라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형태의 ‘권력’들에 대해서도 날을 세운다.
“나는 이 책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라 불리는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교회를 비판했다. 그 교회들을 이끌고 있는 목사들에 대한 신뢰를 가능한 만큼 기억에 남을 정도로 부정했다. 그 성도들을 향한 신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실히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들을 향해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 … 단지 우연에 의해 획득된 정신의 고정화된 비늘, 무엇으로도 벗겨지지 않을 인식상의 우둔함과 미련함이 증상의 핵심이다. 나는 그 모세의 수건을 어떻게든 환기시키고 조금이라도 벗겨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대형교회의 예배당과 그들의 집회로부터 끌어내고 싶었다.” _9쪽
이처럼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현실이 ‘자기 부정’이라는 기독교적 구원의 방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설명하는 것은 욕망의 메커니즘,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이다. ‘속지 마십시오’ ‘깨어나십시오’ ‘떠나십시오’ ‘자라나십시오’. 사력을 다해 던지는 이 광야의 요청과 물음을 통과하지 않고서, 한국 교회는, 우리 신앙의 모습은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전에는 그런 욕망을 제대로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그 사실만이 괴로웠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실존이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때문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책임이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통해서 복음적 치유와 회복,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던 동물성과 야수성과 잔인함과 비열함과 교활함과 경박함이 이제는 자기에게서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보다는 침묵을, 표현보다는 사색을, 행동보다는 존재를 선택하게 됩니다. 전에는 ‘Doing’이 최우선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Being’이 우선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201-202쪽)
책 속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현존하는 나의 삶이 신의 현존의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있느냐? 살고 있느냐?’ 주장이나 관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영감, 곧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무수히 느끼다시피 감동이 어찌 억지로 일어나나요? 억지로 감동한 척하면 그것만큼 추악한 일이 없을 겁니다. 그것은 자연에 따르는 게 아니니까요. 진짜 감동이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진실한 자각 가운데서 나오는 거지요. 진정한 감동에는 일관된 이성과 책임 같은 것이 따르지만 센티멘털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됩니다. _155-156쪽
‘믿쑵니다’ ‘할렐루야’로 신앙은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말들이 얼마나 쉽게 할 수 없고, 하기가 어려운 말들인지를 헤아리게 되는 게 신앙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_253쪽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기 전에 여러분의 내면에서 울부짖는 한 영혼에 먼저 직면하십시오. 우리 주변에서 울부짖고 있는 처절한 실존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실존적 고통을 새롭게 인식하며 거기에 반응하는 자각된 사랑 안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수렴되어 있습니다. _264-265쪽
실제론 자기들이 별별 노력을 다 해놓고는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라고 말하고, 그런 걸 좋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용기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여 지성이 생김으로써 발생하는 자기책임의 용기일 겁니다. 자기에게서 솟아나는 것이지만 그게 곧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묻고 싶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구원해줍니까? ‘하나님’이라고 너무 빨리 대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걸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_277쪽
나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중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나라는 내려오는 중이고, 내 교회도 내려오는 중이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도 다 내려오는 중이었다. 나는 내려오는 존재들 속에서 ‘그 꽃’을 발견하려고 두리번거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낙망하고 절망한 자기는 결코 아니다. … 지금 내려오고 있는 중인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우리가 먼저 내려오며 보았던 정직한 성서적 인식의 ‘그 꽃’들을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을 정직히 발견함으로써 각자 사상의 가을에 도달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이제부터 지난 100년간 한국 교회 번영주의와 긍정주의의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파헤쳐놓은 기독교 예언의 서사적 맥락을 복구하는 삽과 갈퀴를 함께 잡을 수 있지 않을까? _맺음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