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순간이란 문득 그렇게 찾아온다. 목이 메고, 마음이 사무치는 소소한 깨달음과 슬픔의 순간에. 누군가의 노랫말 속에도 그런 순간이 드문드문 있어서 우린 아직까지도 그의 노래를 듣고 그를 추억한다. 그의 노래도 긴 시간 동안 마늘과 꿀처럼 스며들고 스며들어 우리에게 따뜻한 한 잔의 차가 되었다. 너무 쉽게 변해가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렇게 변하지 못하고……. ― 조용미, 「세상의 모든 노래들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 걸까」 중에서
서른네 명 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김광석을 그린 시에세이집 '이럴 땐 쓸쓸해도 돼'가 출간되었다. 시인에게 노래하는 음유시인 김광석은 어떤 존재였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다. 이제 서른 즈음을 통과하고 있는 시인부터 칠순을 훌쩍 넘긴 노시인에 이르기까지 박준, 김이듬, 김행숙 외 서른한 명은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김광석을 떠올리며 산문 한 편과 시 한 편씩을 뽑아 올렸다.
문형렬 시인은 김광석이 불교방송 심야 프로그램 진행자였을 때,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조촐하게 소주 한잔을 걸치며 그와 직접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백창우 시인은 김광석의 노제 당일 그토록 쓰고 싶지 않았던 추모시를 쓰던 기억을 더듬는다. 이원 시인은 김광석의 목소리와 노래가 어떤 무늬를 지녔는지를 써 내려가고, 김근 시인은 대학 졸업 여행을 가던 버스 안에서 갈 곳 모르던 어린 청년들이 한마음으로 「나른한 오후」를 부르던 때를 회상한다.
직접적으로 김광석을 주제 삼거나 호명하지 않는 대신 경험에 바탕하여 삶에 대한 사색을 풀어놓는다. 김광석의 노래가 생각지도 않았던 사이 훅 끼쳐 찔러 들어온 것처럼, 이 책 '이럴 땐 쓸쓸해도 돼' 속 시인의 문장들도 그러하다. 한 문장 혹은 하나의 산문 전체가 기다란 여운을 남기며, 마음의 빈 공간을 헤집는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라는 불안과 막막함, 시기를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 잃어버린 우정, 갈수록 힘겹거나 때로 지긋지긋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한때는 각별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데에서 오는 아픔, 새벽에 홀로 깨어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세밀한 감정들이 녹아 있는 것이다.
‘김광석’은 나에게 하나의 기호 혹은 은유로 존재한다. 나에게 청춘이 있었다면, 그 시절은 그의 노래와 함께 머문다. “비록 떠가는 달처럼, 미의 잔인한 종족 속에서 키워졌지만”(W. B. 예이츠, 「첫사랑」) 창백한 얼굴 위로 내리던 햇빛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을 좋아했고 그로 인해 즐거웠으며 마음의 누수로 어지럽고 아득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 김이듬,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중에서
나는 일이 끝난 뒤 혼자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취해서 돌아와 옆구리를 더듬으면 얼음 같은 게 만져졌다. 그러다가 혼곤한 잠에 빠져들어 기억도 나지 않는 꿈들을 단속적으로 꾸곤 했다.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내 30대는 그토록 영화로웠으나 다른 한편으로 가엾었다. 그 시절은 세속과의 싸움, 젊음의 끝 간 데 없는 열정, 어지러운 방황들, 이상한 허무주의, 선량함과 위악들로 얼룩져 있다. ― 장석주, 「어디에도 갈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중에서
왜 김광석일까. “사람으로 외롭고 피곤해하는” 일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버텨내는 삶의 한 단면을 섬세하게 포착했기 때문 아닐까. 결국 모든 사람이 생애의 특정한 지점을 지나고 있을 때, 한 번 혹은 여러 번 절실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그의 노래에 담겨 있다. 그리하여 꾸밈없이 쉬운 언어로 그가 우리에게 거는 말들은 마음의 북을 둥둥 울리고, 노랫말이 마치 나의 삶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다만 쓸쓸함, 공허, 외로움들을 끌어안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이렇게 나직하게 권유하기도 했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아 /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 일어나. 일어나”(김광석, 「일어나」)라고.
정호승 시인은 '이럴 땐 쓸쓸해도 돼'에서 김광석의 마지막 노래의 가사가 되어버린 「부치지 않은 편지」의 탄생 비화를 밝혔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의 시대적 죽음이라는 비극을 마주하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김광석의 음성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가 여전히 숱한 사람들에 의해 불리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제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는 서둘러 세상을 떠난 김광석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핍박받는 우리 보통 사람들일 수도 있다고.
당신의 짧았던 미완의 생애가 아름다움을 불러왔다면 그때의 아름다움은 이미 완성이라 말하리. 언제 들어도 마음이 유순해지는 당신의 노래 안에서 각자는 고독을 다스리고 상처를 덮는다. 그리고 곧 아련해진다. 달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하는 몰입과 공감, 그렇게 당신과 당신의 노래는 일체가 된다. 생의 비루함마저 촉촉이 젖는다. 그때 여지없이 바람 소리가 있고 온몸으로 스미어오는 당신은 그리움이다. ― 이규리,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