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발표하는 '오늘의 집회 및 행사' 일정에 표기된 전국 각지 박근혜 하야 촉구 시국대회 문구. 대통령 이름을 박OO, OOO로 익명 처리했다.
'박OO 하야 시국대회'
뜨악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주말마다 전국팔도를 촛불로 물들이는 바로 그 집회를 경찰은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 시시각각 곳곳에서 열리는 집회와 행사 일정을 경찰이 정리한 '오늘의 집회 및 일정표'에 적힌 문구다.
일정표엔 경찰에 신고된 집회와 행사 명칭과 일시·장소, 참가 인원, 행사 내용, 관할지 경찰서 등이 적혀있다.
주최측이 신고한 정식 집회명이 이런 식으로 익명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건기자 3년 차인 기자는 그날 처음 알았다.
거리로 나선 국민들이 공인 신분의 대통령 이름을 '보호해야 할 사생활' 쯤으로 여겨 배려했거나, 명예훼손을 당할까 두려워 집회명을 익명으로 신고했을 리 만무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기분을 잠시 묻어두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지인 기자들에게 그쪽 상황을 물었다.
다른 지역도 다를 바 없었다.
서울은 '박OO 퇴진하라 국민행진'.
대전과 부산도 마찬가지. '내려와라 박OO! 시민 촛불행동', '박OO 대통령 및 정권 퇴진 촉구 대회'.
대구와 경북은 한술 더 떠 'OOO'이란다.
대구지역 야3당 지방의원이 개최한 집회는 'OOO 하야 촉구 시국선언 기자회견'으로, 경북 각지서 열린 농민회와 민주노총 주최 집회 역시 'OOO 하야 촉구 시국 집회'로 둔갑됐다.
기자가 알아본 지역 중 단 한 곳만이 '박근혜'라고 대통령 실명을 박았다.
각 지역 경찰의 표기 방식이 제각각 다른 것을 미뤄볼 때 '대통령 실명은 익명 표기하라'는 내부 지침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경찰 스스로 '알아서' VIP 실명을 자체 검열한 꼴인 셈이다.
콘크리트 지지층 5%. 거의 모든 국민들이 매주 촛불로 성난 민심을 표출하는 시국이다.
남녀노소 거리로 나와 대통령의 이름을 또박또박 외치며 하야와 퇴진을 부르짖는 판이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이 집회를 경찰은 어떻게 손대고 있나.
그들은 해괴한 익명 처리로 공분의 대상을 멋대로 지워버렸다.
전국팔도 기자들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모두 쓴웃음을 날렸다.
경찰 조직이 굴러가는 판을 보면 얼핏 "그럴 수도 있겠다"고 보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그래도 그런 그들조차 결국은 "어이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우습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그렇게 두려운가."
"국감 출석할까 저러나? 국정원이 개인 사찰 붙을까봐?"
"수수께끼냐. 공공연하게 다 아는 걸 굳이 왜 저렇게 하느냐."
"내부 문서라면 이해한다. 우두머리의 우두머리니까. 그런데 이런 문서까지 저렇게 써야 하느냐."고.
물론 통쾌한 풍자도 잊지 않았다.
"볼드모트다. 이름을 말해선 안 되는 자다."
"차라리 길라임이라고 써라." 등등.
꼭 그렇게 익명 처리를 했어야만 속이 후련했던 건지 경찰에게 물어봤다.
"실명을 거론하기가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 여러 경찰들의 공통적인 대답이었다.
고작 문서 한 장에 적힌 사소한 익명 표기 하나에 던지는 분노가 다소 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 문서의 기록들이 모여 역사의 한 장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이는 결코 사소하거나 가벼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국가경찰의 임무가 또 한 번 낯설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