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사태 이후 재벌기업 경영환경도 많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촛불의 힘을 경험한 주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주주행동주의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주행동주의는 주주들이 배당금이 시세차익에만 주력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지배구조까지 손을 대면서 경영에 관여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주주행동주의는 이번 사태 훨씬 전부터 있어왔다.
지금까지는 외국계 헤지펀드에 의해 주도돼 왔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실제로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반대하고 나섰을 때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사건 이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당시 반대하지 않았던 국민연금에 오히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삼성측이 미르재단과 최순실씨 모녀에게 부적절하게 돈을 건넨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경유착의 의혹까지 일고 있다.
당시 합병에 찬성했던 국민연금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반대하고 나서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엘리엇의 위상은 올라갔다.
이는 주주행동주의와 함께 이를 표방하고 있는 헤지펀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물론 일부 헤지펀드의 경우, 기업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단기차익만을 노려 회사에 무리한 요구를 해 기업사냥꾼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배당부터 사업영역까지 회사 전반의 영역에서 행동주의적인 관여로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하는 쪽으로 많이 움직이고 있다.
장화탁 동부증권 리서치센터 주식전략팀장은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단기차익에 집중한 투기자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전략으로 가고 있다. 아직도 단순히 자본과 관련된 차익에 집중하는 부분도 있지만 기업의 가치를 올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들에게는 주주의 가치와 회사의 가치가 일치할 때가 가장 성과가 좋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변화에 발맞추어 국내에서도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한 헤지펀드가 처음으로 출시됐다.
라임자산운용의 ‘라임 데모크라시’ 헤지펀드가 그것이다.
라임이 이 펀드를 준비한 것은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와는 무관하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는 “라임 데모크라시’펀드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최순실 사태가 터지기 한달 전부터였는데, 공교롭게도 준비하는 도중에 최순실 사태가 터졌다. 우리가 보기에 행동주의는 전세계적인 트렌드이다. 장기펀드도 행동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행동주의 펀드 규모가 4배로 커졌고 수익률도 좋게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이 아시아 쪽으로 넘어오고 있는 추세로 여기에 우리도 가세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이 아시아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사내유보금이 많아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나라는 대기업이 사내유보금을 많이 갖고 있는 일본과 한국이다. 한국의 경우 기업이 갖고 있는 현금은 사상최고치이다. 사내유보금이 많으면 자본에 대한 이익률이 떨어지니까 주주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다. 주주들은 사내유보금을 배당으로 돌려주라고 당연히 요구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이들 기업에서는 주주행동을 통해 배당금을 많이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원종준 대표는 설명했다.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행동주의 펀드에 긍정적인 요인이다.
원종준 대표는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안좋은 점만 부각됐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한 것에 대해 지금은 틀렸다고 얘기 안한다. 그만큼 엘리엇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알고 보니까 엘리엇이 아니라 삼성에 문제가 있었네’라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이 펀드의 앞날이 순탄할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이 펀드에 얼마나 많은 자금이 들어올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행동주의를 내걸려면 회사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경우 회사가 귀담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지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15개 펀드를 운영하고 있고 전체 운용자금의 규모가 5천억원 수준인 라임자산운용이 행동주의를 내걸고 모을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수십조원대의 운용자금으로 행동주의를 펼치고 있는 글로벌 헤지펀드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 규모다.
그럼에도 이제 첫 걸음이니 만큼 가능성은 열려 있다.
“현행 제도 아래서도 0.1%의 지분만 있어도 회사에 회계장부를 보여달라고 할 수 있고 0.5% 이상이면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 이번에 삼성전자에 주주제안을 한 엘리엇의 지분은 0.6, 7% 수준이었다. 또 좋은 제안을 하면 다른 외국인투자자나 투자자들의 표를 불러모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지금은 SNS도 발달돼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원종준 대표는 말했다.
이같은 펀드가 아니더라도 주주행동주의의 여건은 무르익고 있다.
기관투자자들의 주주활동 원칙을 담은 스튜어드십 코드가 마침내 올해 안에 시행될 예정이다.
기관투자자들은 고객의 돈을 갖고 운용하고 있지만 회사를 상대로 주주권을 행사해 회사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회사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주주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외국의 기관투자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가치가 떨어진다며 대부분 반대를 표했지만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삼성의 압력에 굴복해서인지 대부분 찬성 쪽으로 손을 들었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물론 기관투자자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은 자율에 맡겨져 있지만 최근의 사회 분위기는 기관투자자들에게 상당한 가입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관심은 500조원대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큰 손인 국민연금의 가입여부이다.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찬성한 것을 두고 정경유착의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국민연금 기금을 운용하는 조직의 개편과 함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에 대한 압력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대표는 “우리나라 시장의 구조나 이해관계의 복잡성을 보면 주주행동주의가 꽃을 피우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하지만 행동주의의 분위기는 이미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기업 경영진에게 주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욕망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목소리가 힘을 발휘하려면 시장 내에 중심을 잡는, 신뢰받을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6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총수 9명 중 6명이 지난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 나왔던 재벌 총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28년이 지나도 정경유착의 고리는 끊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이 행동에 나서면서 쳇바퀴 돌듯이 계속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