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폭락에 항의하는 농민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해 쌀값이 21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폭락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이 정부에게서 받은 공공비축미 우선지급금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게 됐다.
정부는 시세에 비해 많이 지급된 쌀값은 봉급생활자를 비롯한 국민들이 어렵게 납부한 세금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환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봉급생활자들이 세금 연말정산 하듯이 농민들도 쌀값 우선지급액과 확정지급액의 차액을 정산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비롯한 농민단체들은 정부의 정책 실패로 발생한 쌀값 폭락 사태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우선지급금 환급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환수할 금액이 많지도 않은데, 어려움에 빠진 농민들을 보호해주는 게 정부 역할이라는 것이다.
24일 농림축산식품부와 농민단체 등에 따르면 지난해 쌀값이 1995년 이후 최저치인 12만9711원(수확기 산지 80㎏ 기준)까지 폭락하면서 쌀 농가 농민들이 정부에게서 받은 우선지급금 중 일부를 환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우선지급금은 정부가 쌀값 안정을 위해 공공비축미나 시장 격리곡을 쌀 농가에서 매입할 때 현장에서 미리 지급하는 돈을 말한다.
매입가격은 수확기인 10~12월 평균 가격을 적용하는데, 정확한 매입가격은 12월 말이 돼야 확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편의를 위해 미리 지급한다고 해서 우선지급금이라 부른다.
이후 수확기 가격이 확정돼 최종 매입가가 결정되면 정산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매입가가 우선지급금보다 높으면 정부가 농민에게 차액을 추가로 지급하고 우선지급금이 더 높으면 농민으로부터 차액을 돌려받게 된다.
지난해의 경우 우선지급금은 8월에 1등급 40㎏ 포대 기준으로 산지 쌀값의 93% 수준인 4만5000원으로 책정됐다.
하지만 쌀값이 폭락하면서 실제 매입가격은 나중에 4만4140원으로 확정됐다.
포대당 860원의 차액이 발생해 농민들이 이미 받은 돈 가운데 이 차액을 토해내야 할 처지에 처한 것이다.
농식품부는 전국적으로 돌려받아야 할 환급금 규모가 195억원이며, 농가당 8만5천원가량이라고 설명했다.
농식품부는 공공비축미 우선지급금 제도를 도입한 2005년 이후 2015년까지는 우선지급금이 실제 매입가보다 낮아 포대당 평균 4500원 정도를 추가 지급해왔지만, 지난해에는 우선지급금이 매입가보다 포대당 2400원 더 높아 농가가 우선지급금의 일부를 정부에 반납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농식품부는 27일부터 환급을 요청하는 고지서를 각 농가에 발송해 우선지급금 과다 지급으로 발생한 차액을 환수할 계획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우선지급금은 정산을 전제로 한 가지급금이며, 농가는 매입계약서 서명을 통해 반납금이 생길 경우 환급하기로 이미 서명한 상태"라며 "환급을 거부한다면 우선지급 시스템의 지속적 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당연히 반납해야 할 우선지급금 차액을 환급하지 않을 경우 공공비축미 매입에 참여하지 않은 농가들과 쌀이 아닌 타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상당수 농민들은 쌀값이 폭락해 소득이 줄어든 것도 타격인데 이미 지급한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정부 정책 실패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전농 관계자는 "정부가 수입해도 되지 않는 쌀을 수입하는 등의 정책 실패로 쌀값을 폭락하게 해놓고 농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우선지급금 환급 거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전농은 오는 25일 정부의 우선지급금 환급 업무를 대행하는 농협중앙회 앞에서 환급 거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이에 대해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쌀값 폭락 등으로 속이 상한 농민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규정에 따라 돌려주도록 돼있는 환급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은 문제"라며 "환급금은 일단 돌려주되 쌀값 폭락이나 정부 정책 실패 등의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다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