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멤버 예린이 팬이 착용한 안경 몰래카메라를 보고 있다.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한 인기 걸그룹의 팬사인회. 한 남성이 사인을 해주는 멤버들 앞에 앉는다. 멤버 중 한 명이, 남성이 착용한 안경을 유심히 바라보다 안경을 벗긴다. 안경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멤버는 이내 다시 남성에게 안경을 건네주고, 남성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스태프를 불러 안경이 '몰래카메라'(이하 '몰카')임을 알린다. '파워청순'을 콘셉트로 대세가 된 여자친구 팬사인회에 나타난 '안경 몰카남'의 이야기다.
한 팬의 캠코더에 찍힌 해당 영상이 최근 SNS에 널리 퍼지면서 아이돌그룹, 그 중에서도 특히 걸그룹 인권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몰카'를 최종 확인해 매니저에게 알린 멤버는 끝까지 이 안경 '몰카'를 착용한 팬에게 팬서비스를 마무리했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낼 법한 일임에도 멤버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 온 팬을 최대한 배려한 셈이다.
여자친구 측 관계자는 "이후 해당 팬의 안경을 압수하고 퇴장 조치했다. 안경 '몰카'를 착용한 팬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면서 "따로 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런 행사에 각별히 신경을 쓰겠다"고 이야기했다.
'몰카'를 발견한 멤버는 엄연히 피해자였지만 영상을 접한 일부 팬들은 이런 행위를 조롱하거나 불쾌감을 표했다. 특히 남성 팬들이 주로 활약하는 커뮤니티에서는 해당 멤버가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앞에서는 웃어주다가 뒤에서는 몰래카메라를 고발해 팬을 곤란에 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부위를 촬영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에 따르면 수치심을 유발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하거나 촬영물을 공공연하게 판매·전시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값비싼 카메라를 소지한 '대포' 팬들이 아이돌 멤버들을 촬영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은 이미 주류 팬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일부 팬들의 주장처럼 '몰카'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문제시 될 수 없는 것일까.
'아이돌 메이커'의 저자 박희아 기자는 "이번 '몰카' 사건은 관음의 시선이다. '대포' 팬들의 카메라는 아이돌 멤버들의 인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촬영은 사실 범죄나 다름없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어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촬영이 허용되고, 공개된 장소에서 '몰카'를 찍은 것이기 때문에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팬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팬사인회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슨 짓이든 용서받는 면죄부는 될 수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후, 이를 감내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해당 멤버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은 결과다.
사태를 지켜 본 한 네티즌(@OUT___DOG)은 "여자 아이돌들의 위치를 너무 뼈저리게 깨닫는다. 남성 팬들이 '몰카'(몰래카메라) 안경이 잘못됐는지 모르는 이유는 본인들은 돈을 내고 팬사인회를 가니까 그 시간과 공간과 아이돌 멤버들을 한꺼번에 '구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걸그룹들은 보이그룹들보다 이런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 여자친구 이전에 트와이스, 우주소녀 등 걸그룹 멤버들 역시 남성 팬들의 도 넘은 발언에 상처 받은 사례가 있다. 문제는 감정적 피해를 당한 멤버들이 여기에 불쾌감을 드러내면 이를 두고 '예민한 여성'으로 취급하는 현실이다.
이는 국내 걸그룹 멤버들이 얼마나 쉽게 성적 대상화되고, 순종적인 태도와 수동성을 강요받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대다수 걸그룹들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지는 왜곡된 성적 판타지의 집약체다. 이들은 남성을 떠나 주체적일 수 없는 이미지로 소비되며, 순수하고 예쁜 웃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아직도 많은 걸그룹들은 이런 판타지를 요구받고, 최대한 이를 구현한 모습으로 팬들과 만난다.
박희아 기자는 "이번 사건은 공론화됐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페미니즘 담론 속에서는 최근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걸그룹 인권과 대상화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공식적으로 없었다. 그런데 업계와 대중이 문제임을 인식했으니 또 다시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