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까칠남녀' 방송 화면 갈무리)
#1. "맞은편 남자가 계속 내 다리를 훑어보는 걸 느껴서 쳐다봤더니 씩 웃는데 소름이 끼쳤다." - 지하철에서#2. "제가 보고하러 들어갈 때마다 습관처럼 눈을 제 다리에 고정시키고 있더라." - 직장에서#3. "남자들이 가슴만 빤히 보니까 그게 너무 싫어서 (가슴을) 떼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 버스 안에서
주변 여성들로부터 이러한 고충을 들었을 때 "네가 예민해서 그런 것 아냐?"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무지하고 무책임한 반응은 아닐까. 우리는 최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권력자가 검찰에 출두하면서 내비친 눈빛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시선에는 권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난 24일 밤 방송된 EBS 1TV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에서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라는 주제로 시선 폭력(불순한 표정이나 눈빛으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에 담긴,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남녀 사이 권력지형을 짚어봤다.
이날 방송에서 철학자 이현재는 "누군가를 본다는 것 자체로도 대상화가 되는데 이것을 굉장히 공격적으로, 또는 한 곳만 굉장히 대상화시켜서 바라본다고 했을 때, 바라봐지는 사람은 그 시선 앞에서 자신의 주체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인격을 박탈당한다"고 지적했다.
즉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것, 굉장히 공격적으로 쳐다보는 시선 자체는 권력의 문제가 맞다"는 것이다.
'시선 강간'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시선만으로 상대방에게 강간에 준하는 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에 대해 성우 서유리는 "어떤 방송에서 여성 아이돌들의 뒷모습을 남성 출연자들이 굉장히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논란이 돼 이러한 신조어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기생충 박사 서민은 "강간을 당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것에 준할 만큼 불쾌하다는 뜻에서 붙인 것 같다"며 "무엇이든지 용어를 세게 규정해야 남자들이 조심하지 않겠나. 적절한 표현으로 본다"고 말했다.
작가 은하선도 "그나마 '쳐다보지 마'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다가, 시선 강간이라는 강한 표현을 하니까 '쳐다보는 것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철학자 이현재는 "강간이라는 말을 시선과 접합시키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의도하지 못한 다른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어요. 시선 강간이라는 말에는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굉장히 수동화된 육체로 느끼도록 만드는 부작용이 있어요. 따라서 시선 강간이라는 것이 언론에서 얘기됐을 때, 여성들이 오히려 위축돼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시선 강간이라는 말을 사용할지 안할지에 관해 충분히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라는 사회자 박미선의 물음에 "'시선 희롱'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에 작가 은하선은 "그렇지만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꼭 짚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재는 "(시선 폭력을) 구분할 수 있는 핵심이 있다"며 "시선이 어떤 부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내가 너를 대상화하고 있고 지배할 것'이라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