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트릴리' 스틸컷. (사진=오렌지옐로우하임 제공)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의 마지막 주자, 화이트 릴리는 이들 중 유일한 여성 퀴어 영화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도예가 토키코와 그 제자 하루카의 비틀린 관계 그리고 성장을 그렸다.
토키코는 주변 남성들과 일회성 관계를 맺고, 하루카에게도 성적 욕망을 채운다. 그러나 하루카는 자신을 구해준 토키코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토키코의 요구라면 무조건 순종한다. 아슬아슬했던 토키코와 하루코의 관계는 새로운 조수 사토루가 등장하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들은 상처와 아픔이 가득한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좀처럼 자라지도, 헤어나오지도 못한다. 파괴적인 두 여성의 관계 속에서 남성은 촉매제로만 기능할 뿐,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영화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관계와 욕망의 실체를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드라마 장르임에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이유다.
영화의 연출은 다소 생각지 못한 감독이 맡았다. 다름 아닌 일본 유명 공포 영화 '링시리즈'의 나카타 히데오 감독이다. 영화 홍보 차 지난달 한국에 방문한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와 닛카츠 영화사의 인연은 32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공포 영화로 유명해진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1985년 닛카츠 영화사에서 근무하며 '상자 안의 여자'라는 영화의 조연출을 담당했었다.
"32년 전에 조감독으로 닛카츠 영화사에 들어갔었어요. '로망 포르노' 장르에 강한 동경을 갖고 있었죠. 작품성도 높고 예술적인 작업이었거든요. 거기에 직접 참여하고 제작했던 사람으로서 '로포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나카타 히데오 감독이 1985년 닛카츠 영화사에서 조연출로 참여한 영화 '상자 안의 여자' 포스터.
사실 1980년대 '로망 포르노'가 유행했을 당시에도 이것이 'AV'(Adult Video·성인 비디오)와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청년이었던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그럼에도 '무엇인가 달랐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성적인 표현이 담겨 있으니까 '로망 포르노'가 'AV'와 무엇이 다르냐는 논란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으로 이런 영화를 많이 본다고 알고 있어요. 그 차이를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긴 한데 단순한 '성애'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번에는 젊은 배우들과 스태프들로 팀을 새로 꾸렸어요. 여성들 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인데 그 드라마가 어떻게 새롭게 울려퍼질 수 있을지 생각하며 제작했습니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토키코와 하루카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에는 남녀 관계 또한 등장하지만, 유독 두 여성의 관계는 하얀 배경과 꽃 등을 사용해 꿈처럼 환상적인 연출을 의도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침잠된 분위기로 진행되지만 유일하게 톤이 밝은 부분이 바로 이 장면들이다.
"'담백한 아름다움'이라는 테마였습니다. 촬영 조명 감독님이 어두운 조명을 쓸 것인지, 하얀 조명을 쓸 것인지 물어봤거든요. 그렇다면 추상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고, 꿈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하얀 조명을 써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두 배우 간의 나이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사라지게끔 표현하고도 싶었습니다."
'화이트 릴리'라는 제목은 여성들 간의 사랑을 '백합'으로 표현하는 일본 문화에서 가져왔다. 과거 '로망 포르노' 전성기 시절에는 '백합물'이 상당한 유행을 했었다고. 영화 속 관계에 상당히 충실한 제목이다.
영화 '화이트릴리' 스틸컷. (사진=오렌지옐로우하임 제공)
어찌보면 '화이트 릴리'는 포르노보다는 성장 드라마가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어떤 사건 이후로 서로를 속박해오던 두 사람이 관계에서 해방돼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 의존하며 속박하고 있던 관계에서 해방됩니다. 다시 같이 살자는 토키코의 뺨을 하루카가 때리는데 그건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죠. 이별을 기념하는 러브신이 펼쳐지고 하루카가 토키코를 떠나면서 웃는 이유도 이겁니다. 하루카는 토키코가 다시 도예가로 살아갈 수 있고, 자신 역시 제대로 토키코와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굳이 '리부트'를 하지 않아도 기존 '로망 포르노'는 온전히 남성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여성 관점에서의 욕구까지 그린 작품이 있다는 것이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설명이다. 이번 '화이트 릴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 작품이기를 바라고 있다.
"예전 '로망 포르노'에는 의외로 여성들이 우위에 있는 작품들이 많았어요. 여성 동성애자를 주제로 만들기도 했고, 성전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작품도 있었죠. 시대의 흐름을 뛰어넘어 앞서 나가는 경우였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관점에서 성적 욕구를 보고, 그리는 측면도 있기는 해요. 젊은 세대 여성들도 '로망 포르노'를 보는 분들이 있는데 그 안의 여성 주인공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남성의 성적 욕구 충족의 범위를 뛰어 넘어 여성들이 주체가 된다고 해석을 해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남성 시각으로 여성들의 욕구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역시 두 사람의 성애 장면이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 치우져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 담론이나 여성의 성적 해방에 강하게 초점을 맞춰 영화를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이트 릴리'는
인간의 상처와 성장에 대한 탐구일지언정, 여성의 욕구와 자유를 찾는 여정으로 보기 어렵다. 특히 성애 장면은 두 사람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보다는 아름다운 백합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여성 동성애자들이나 여성 관객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로망 포르노'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자세히 물어보긴 했었죠. 이 영화가 신주쿠에서 개봉한 적이 있는데 여성 동성애자 관객들도 많았어요. 나이가 좀 있는 여자 관객분이 '여성 동성애자에 대해, 여자들만의 사랑에 대해 잘 연구를 해줘서 감사하다'고 하셨던 게 기억 나네요. 물론 남성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 걸로 알아요. 아무래도 '로망 포르노'가 남성 관객이 위주라 대부분 이런 면이 있고요. 여성들끼리 관계가 절정으로 향할 때는 남성의 눈으로 납득 할 수 있는 장면이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