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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이승엽, 더 이상 미안해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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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보' 이승엽, 더 이상 미안해 하지 말아요

    '이제 국민 타자의 짐을 내려줍시다' 삼성 이승엽이 3일 넥센과 홈 경기에서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마친 뒤 열린 은퇴식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대구=삼성)

     

    이승엽(41·삼성)은 참 미안한 게 많은 선수다. 그렇게 야구를 잘 했는데도 미안하단다. 너무 야구를 잘 해서 그게 자신을 옥죄는 굴레가 돼서 미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하기에는 어쩌면 잔인하지만 그게 이승엽의 인생이고 운명이었다. 너무나 야구를 잘 해서, 홈런을 정말 잘 때려서 칭찬을 받았지만 오히려 부담이 될 때가 사실 더 많았다. 그래서 그 기대치에 조금만 못 미치면 이승엽은 미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23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마당에서도 이승엽은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는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가지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반대로 이승엽은 싹수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이승엽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선수였다. 그런데 엄청난 성장과 발전을 하면서 책임도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적잖은 사람들이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도망친다. 그러나 이승엽은 '국민 타자'라는 극한의 책임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부단히 채찍질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내는 선순환을 이뤄냈다.

    그 노력의 결과가 23년 동안 그가 쌓은 엄청난 숫자들이다. 이승엽은 KBO 리그에서 15시즌만 뛰었음에도 20년 이상을 뛴 선수들보다 많은 홈런(467개)과 타점(1498개), 득점(1355개), 루타(4077개), 2루타(467개)를 생산해냈다. 일본에서 뛴 8년 동안 얻은 159홈런, 439타점은 빼고서도 말이다.

    그런데도 미안할 게 남았다. 이승엽은 3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넥센과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홈 경기에서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홈런 2방에 3타점으로 전성기 못지 않은 장타력을 뽐내며 10-9 승리를 이끌었다.

    '라이언킹의 마지막 질주' 삼성 이승엽이 3일 넥센과 홈 경기에서 3회 개인 통산 467호 홈런을 날린 뒤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대구=삼성)

     

    경기 후 성대하게 치러진 은퇴식에서 이승엽은 울었다. 이수빈 삼성 구단주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 출연금을 전할 때부터 눈물이 터졌다. 10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상이 나오자 쏟아졌다. 자신의 이름은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과 응원가에도 글썽거렸다.

    은퇴식을 마친 이승엽은 일단 첫 눈물의 의미를 설명해줬다. 일본 오릭스에서 2011시즌을 마치고 친정팀 삼성 복귀를 이뤄준 장본인이 이 구단주였기 때문이었다. 이승엽은 "사실 은퇴를 더 빨리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구단주께서 결정을 내려주셔서 6년을 더 뛸 수 있었다"면서 "당시 김인 사장님과 류중일 감독님도 마찬가지"라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 다음은 죄송함의 눈물이었다. 이승엽은 "은퇴식 동영상 중 어머니 생전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고 눈물이 났다"면서 "오늘 같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막내인 나 때문에 생을 일찍 마감한 것 같아 정말 죄송하고 함께 하지 못한 게 한이 맺힌다"고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막내 아들 야구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본인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실 정도로 고생하셨다"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승엽의 모친은 2007년 1월 암 투병 중 5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승엽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런 모친이었으니 자신의 은퇴식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내 어머니' 이승엽이 3일 자신의 은퇴식 도중 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대구=삼성)

     

    예전부터 후배들에게 미안한 게 많은 이승엽이다. "삼성에서 15시즌을 뛰면서 팀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해가 된 적도 있었다"면서 이승엽은 "특히 나 때문에 집중해서 플레이하지 못한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털어놨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삼성 최강 타선을 이끈 이승엽은 8년 동안의 일본 외도 끝에 2012년 복귀해 삼성 왕조 건설에 힘을 보탰다.

    다만 워낙 이승엽에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쏠린 부분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삼성 선수들이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승엽은 나이 어린 후배들과 당당히 경쟁을 통해 실력을 입증받았다. 2013년 최악의 부진에 빠지기도 했지만 타율 3할8리 32홈런 101타점으로 부활했고, 올해도 24홈런 87타점으로 건재했다.

    그럼에도 이승엽은 물어나야 할 때를 알았다. 이승엽은 "떠나야 할 때"라면서 "내가 빠지면 2군에서 후배들이 경쟁을 통해 올라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떠나면서도 미안하다. 이승엽은 "후배들과 미팅을 하면서 '선배로서 2년 연속 9위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면서 "나는 전통 있는 팀에서 15년을 잘 뛰었는데 어려운 상황에서 떠나니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사실 국제대회를 돌아보면 미안한 일 투성이다. 이승엽은 한국 최고의 타자였던 만큼 주위의 기대는 절대적이었다. 이런 부담감에 상대 투수들의 당연한 집중 견제에 고전했던 이승엽이다. 아무리 좋은 타자라도 나쁜 공에는 좋은 타구를 만들기는 어려운 일. 그러나 기대가 워낙 컸던 터라 이승엽은 마음이 급해 방망이가 나갔고, 타격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승엽은 국가대표팀의 중심 타자에 배치됐다. 겨우 23살이던 1999년 54홈런을 때려낸 이승엽은 시드니올림픽 3, 4위 결정전에서 일본의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결승타를 뽑아냈다. 이승엽은 "앞서 삼진을 3개나 당하고 4번째 안타를 쳤을 때 희열이 컸다"면서 "못 쳐서 팀이 졌다면 내가 다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베이징올림픽 때는 더 했다. 이승엽은 당시 4번 타자임에도 1할대 타율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4강전에서 2-2로 맞선 8회 극적인 결승 2점 홈런을 날리고 포효했다. 은메달 확보는 물론 한국의 9전승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한 방이었다.(이승엽은 쿠바와 결승전 때도 1회 선제 결승 2점 홈런을 날렸다.)

    이승엽이 2008 베이징올림픽 일본과 4강전에서 8회 결승 2점 홈런을 날린 뒤 포효하는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당시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이승엽은 "너무 미안해서…"라고 입을 뗐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다소 안정을 찾고 인터뷰에 나섰지만 이승엽은 "팀의 4번타자인데 부진해서 너무 미안했어요. 후배들에게 정말 중요한 경기인데..."라면서 울먹였다. 만약 이 경기에서 졌다면 이승엽은 사실 병역 혜택이 걸린 후배들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터였다.

    은퇴 회견에서 이승엽은 "열심히 해주는 후배들을 위해서 좋은 경기를 해야 했는데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면서 "당시 후배들을 볼 낯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홈런을 때리면서 이승엽은 미안함 대신 뿌듯함을 가질 수 있었다.

    결과가 좋아서 그렇지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어땠겠는가. 이승엽은 모든 비난과 욕설을 한몸에 받아야 했을 터. 실제로 베이징올림픽 당시 관중석에서는 이승엽에 대한 욕설이 터져나왔다. 일본 출신으로 15년째 한국 야구를 취재하는 무로이 마사야 기자는 "당시 관중석에 경기를 보는데 이승엽에 대한 팬들의 비난이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염치를 알고 마음이 여린 이승엽, 본인은 오죽했겠는가. 이승엽은 은퇴식을 마친 뒤 '국민 타자'라는 굴레에 대한 소회를 들려줬다. "국민 타자로 사는 건 정말 힘들었다"면서 이승엽은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자리였고, 국민 타자라는 단어가 어깨를 짓눌렀다"고 털어놨다. 앞서 언급했듯 야구를 너무 잘해서 스스로 얻은 굴레였다.

    하지만 이승엽은 피하지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승엽은 "'국민'이라는 수식어는 소수만 얻는 행운"이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국민 타자라는 타이틀이 붙고 나서 나도 더욱 노력하고 성장했다"면서 "지나고 보면 행복했던 때가 더 많았다"고 긍정의 사고를 보였다. 그랬기에 지금의 '국민 타자' 이승엽이 있었던 것이다.

    '이젠 눈물 대신 축포만' 이승엽이 3일 자신의 은퇴식 말미에 대구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대구=삼성)

     

    애초 이승엽은 야구 시작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 난 것일지도 모른다. 은퇴 인터뷰 말미에 이승엽에게 '당신의 야구 인생 중 여러 갈림길이 있었을 텐데 최고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승엽은 "야구를 한 게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구를 시작했다"는 이승엽은 "그때 야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승엽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최고의 선택 이후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그 이후 타자 전향과 해외 진출, 복귀, 은퇴까지 모든 선택은 내가 했다"면서 "대체로 내 선택이 모두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야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었고, 주위의 기대와 부담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굉장한 실력에도 조금의 실수와 부진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인성까지 갖췄던 이승엽.

    "이제는 국민 타자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더 이상 미안해 하지 말았으면, 또 더 이상 괴롭고 슬픈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차고 넘치게 잘해줬고, 국민들은 그 이상으로 위안과 보답을 받았습니다. 굿바이, 국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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