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가 26일 대리인 제도를 시행하기로 발표하면서 한국 프로야구도 2018시즌 뒤 스토브리그부터 에이전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사진=KBO)
한국 프로야구에도 드디어 에이전트(선수 대리인) 제도가 시행된다. 16년 동안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 명령을 버텨왔던 한국야구위원회(KBO)도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은 막지 못했다.
KBO는 지난 26일 이사회를 열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과 선수 대리인 제도와 관련된 합의 사항을 보고받고 내년 시즌부터 선수 대리인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장 다가올 스토브리그 이후 내년 2월부터 에이전트 제도가 시행되는 것이다.
일단 선수 대리인은 선수협의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공인을 받은 대리인은 구단별로 3명, 총 15명까지 선수를 보유할 수 있다. 다만 KBO는 제도 시행 초기라 에이전트의 영역을 선수 계약 교섭 및 연봉 계약 체결 업무, KBO 규약상 연봉 조정 신청 및 조정 업무의 대리로 제한했다.
KBO는 2001년 공정위의 시정 명령 이후에도 대리인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시행 시기 미합의 및 절차 규정 미비 등이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선수들의 몸값 폭등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스캇 보라스 등 슈퍼 에이전트를 내세운 메이저리그(MLB)처럼 천문학적인 몸값으로 리그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KBO 리그는 FA(자유계약선수) 100억 시대가 열렸다. 제도가 시행 중인 프로축구 등 스포츠 에이전트는 시대적인 흐름이다. 선수가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도록 계약 부문을 전문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조력자는 프로에서 필수적이다.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를 자부하는 프로야구도 더 이상 이런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시즌 뒤 스토브리그에서는 100억 원 안팎의 대형 FA 계약이 쏟아졌다. 150억 원의 롯데 이대호(왼쪽부터)-100억 원의 KIA 최형우-95억 원의 LG 차우찬.(자료사진=해당 구단)
기대감은 적잖다. 선수 홀로 정보와 협상력 부재로 고전했던 것과 달리 이제부터라도 전문적인 도움을 얻어 제대로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는 측면에서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다. 간신히 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됐지만 제약이 많다는 것이다. KBO가 형식적으로 제도만 도입하고, 실제 활성화하는 데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송재우 메이저리그(MLB) 전문 해설위원은 "에이전트 제도가 시행되지만 구단별 3명, 최대 15명까지 제한을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늬만 MLB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송 위원은 "MLB도 최근 2~3년 전부터 선수 노조의 기준에 따라 대리인을 인정했는데 KBO 리그도 선수협이 마련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비슷하다"고 운을 뗐다. 곧이어 송 위원은 "하지만 MLB에는 선수 숫자의 제한은 없다"면서 "어떤 배경에서 이런 제한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극단적으로 KBO가 에이전트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송 위원은 "에이전트 보수는 선수 계약 규모의 5%를 넘지 못하게 돼 있다"면서 "1년 연봉을 기준으로 하면 10억 원이면 대리인 보수는 5000만 원인데 이런 선수 10명이 있어야 매출 5억 원이 되는데 실질적으로 KBO 리그에 이런 선수는 지극히 적다"고 짚었다.
결국 고연봉 선수에게만 에이전트가 몰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저연봉 선수까지 폭넓게 권익이 보장되려면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수협도 "KBO의 대리인 규제는 선수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저연차, 저연봉 선수를 소외시켜 대리인 시장이나 스포츠산업을 위축시킨다"고 지적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는 KBO의 26일 에이전트 제도 시행 발표에 대해 저연차, 저연봉 선수와 관련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서 제도 보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자료사진=선수협)
이렇게 되면 규모가 크고 탄탄한 회사보다는 영세한 업체나 개인이 난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리인 보수 5% 미만의 이른바 '덤핑 제안'으로 고연봉 선수 몇몇만 보유해도 된다는 에이전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송 위원은 "미국처럼 선수들이 광고 수입이 많은 것도 아니라 에이전트도 매출이 크지 않을 것"이라면서 "결국 무분별한 에이전트 난립은 제도의 고사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KBO 및 구단들의 입장도 이해할 만한 부분은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선수들의 몸값은 대부분 모그룹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구단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구본능 KBO 총재도 "이렇게 가다간 다 망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에이전트 제도가 더 큰 몸값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스캇 보라스 같은 MLB의 슈퍼 에이전트라면 KBO 리그가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 보라스는 끝장 협상으로 숱한 대형 계약을 이끌어내면서 MLB 구단들 사이에는 악명이 높다. 성공하는 선수들도 많았지만 이른바 먹튀 선수들도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선수들에게는 인기가 높은 에이전트다.
하지만 최근 FA 대박의 배경에는 구단들의 비상식적인 베팅이 크다. 저변 확대와 선수층 다지기보다 우승을 위해 정상급 선수들을 모셔오려는 구단들이 스스로 시장을 왜곡시킨 면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이는 선수층이 엷은 한국 야구의 구조적인 문제와도 직결된다.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계약하면서 LA 다저스에 입단한 류현진.(자료사진=노컷뉴스DB)
대리인 제도의 취지는 스타급 선수들뿐 아니라 저연차, 저연봉 선수들까지 합리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데 있다. 하지만 현재의 에이전트 제도라면 탄탄한 실력의 에이전트가 선수들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송 위원은 "MLB의 경우는 선수가 능력이 없다는 판단하는 에이전트와는 계약하지 않는다"면서 "자연스럽게 대리인도 경쟁력을 갖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른바 'KBO판 제리 맥과이어'의 탄생은 요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에서처럼 재능을 발굴해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지원해주고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게 하는 에이전트와 선수의 관계야말로 이상적인 모습일 터.
다만 KBO는 "대리인 제도는 KBO만의 의견이 반영된 게 아니라 선수협과 오랜 기간 협의한 끝에 시행을 발표했다"면서 "제도의 미비점 등은 향후 보완을 해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선수협은 대리인 제도와 관련해 "KBO에 2018년까지 FA 등급제, 부상자 제도 등을 차질없이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KBO 대리인 제도는 사실상 2018시즌 뒤 스토브리그부터 본격적으로 실효성이 드러날 예정이다. 1년 이상 남은 만큼 제도의 허점을 보완할 시간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