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을 휘감고 있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이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한령 이후 중국 시장의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한국과 중국이 '한중 관계 개선 관련 양국간 협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는 기대감이 퍼져나가고 있다. 1년여 중국 관련 수출과 사업이 전면 중단되면서 큰 시장을 잃었던 한류업계는 대륙 시장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희망에 휩싸여있다.
하지만 한한령 전과 후 중국 시장은 다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등 항상 불확실성이 컸고 변화가 심했던 중국 시장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전망에도 힘이 실린다.
◇ "열려라 중국 시장"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중국에서 급상승했던 한류 드라마의 인기는 '태양의 후예'로 정점을 찍었고, 최고의 몸값은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가 챙겼다.
'별에서 온 그대'는 "눈 오는 날엔 치맥"이라는 천송이의 대사가 중국의 문화 트렌드로 바꿔버렸고, '태양의 후예'는 대륙을 뒤흔드는 엄청난 인기 속에 온갖 뉴스를 낳았다. '태양의 후예'를 몰아보기 하다 시신경이 손상된 시청자의 사례부터 '송중기 앓이'로 극심한 상사병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중국 당국이 '우려'를 표하는 등 한류 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별에서 온 그대'는 회당 4만 달러(약 4천500만 원)에 중국에 판매됐으나, 2년 뒤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는 그 10배인 회당 무려 40만 달러(약 4억5천700만 원)를 받으며 중국 판권가 최고치를 경신했다. '달의 연인'은 중국 판매만으로 91억 원을 벌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었다. 한한령으로 중국시장이 닫히면서 한류 드라마의 수출은 '제로'가 됐고, 중국 시장에서 나온 수십억원의 수익을 바라보며 사업계획을 짰던 드라마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막대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대장금' 이영애의 복귀작 '사임당 - 빛의 일기'를 비롯해, '엽기적인 그녀' 등이 한중 동시 방송을 위해 사전제작을 했으나, 결국 한국에서만 방송을 해야 했다.
일부 작품은 중국 측으로부터 판권 판매금을 일부 혹은 전액 받았으나, 한중 동시 방송이 무산되면서 계약상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현재 방송 중인 SBS TV 수목극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중국 시장을 겨냥해 사전제작했으나 국내에서만 방송 중이다. 반대로 중국에 콘텐츠를 수출했지만 한한령 탓에 대금을 길게는 1년 넘게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내년 방송을 목표로 제작되는 드라마들은 다시 희망 속 한중 동시방송 등 중국 시장을 사업계획안에 넣고 움직이고 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등을 제작한 iHQ의 황기용 제작본부장은 4일 "중국 동영상 플랫폼 쪽에서 국내 제작사들에 조금씩 접촉을 해오고 있다. 내년 작품 계획을 문의하고 있다"며 "중국 시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중국 전문 에이전시 레디차이나의 배경렬 대표는 "지난 1년 정말 죽을 맛이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조금씩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하루빨리 중국 시장이 정상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중국도 한류가 절실해" 한한령으로 한류업계의 피해가 컸지만, 사실은 중국도 한류 콘텐츠가 절실하다. 방송채널이 2천개가 넘고 동영상 플랫폼이 급속히 확대 성장하면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인데, 한류 콘텐츠만큼 '가성비'가 높은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보다 제작비가 10배 이상이고 배우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자국 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 비해 한류 드라마 판권은 '저렴'한 데다 중국 내 한류에 대한 관심이 커서 높은 화제성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중국 동영상 플랫폼들에 한류 콘텐츠는 '귀한 자원'이다.
한한령으로 한류 드라마의 중국 수출이 막힌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까지 중국에서 한류 드라마의 불법 시청이 기승을 부렸던 것은 한류 드라마의 인기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푸른 바다의 전설' '도깨비' 등이 중국에서 불법 해적판 시청을 통해 큰 화제를 모았고,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서는 불법 콘텐츠임에도 한류 드라마가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한령 이전에는 해적판을 단속하는 듯했던 중국 당국은 한한령 이후에는 불법 콘텐츠 유통을 방관했고, 이로 인한 한류 드라마업계의 피해가 컸다. 이 틈을 타고 '윤식당' 등 한류 예능에 대한 중국 방송사의 노골적인 표절도 확대됐다.
한류 콘텐츠에 대한 중국의 수요는 방송 콘텐츠에 국한되지 않는다.
10월의 마지막 날 열린 송중기-송혜교의 결혼식이 중국 여러 매체에서 불법 인터넷 생중계되고, 웨이보 검색어 1위를 한 게 '사드 갈등 풀린 첫날'의 풍경으로 화제가 됐지만, 사실은 한한령 속에서도 중국 매체와 포털 사이트 등에서는 한류 콘텐츠와 한류 스타가 계속 화제를 모았다. 또 전지현, 김수현, 송혜교 등 대형 한류스타들의 중국 제품 광고도 방송에서만 사라졌을 뿐 대형 입간판 등을 통해서는 볼 수 있었다.
지난 3월에는 한류스타 박해진이 주연한 드라마 '맨투맨'의 종방연 현장이 중국 최대 동영상 사이트 유쿠(優酷)와 소후(搜狐) 등을 통해 생중계됐다. 또 지난 6월에는 빅뱅 지드래곤의 솔로 앨범 '권지용'이 중국 QQ뮤직에서 하루만에 76만2천여 장을 판매하며 12억6천여만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중국 팬들의 한류 사랑은 한한령도 막지 못했다.
◇ "중국 특수 예전만 같지는 않을 것" 하지만 한한령이 걷히고 난 후 중국 시장이 예전만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류 콘텐츠의 수요는 여전하나, 중국이 그사이 발 빠르게 자국 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웠고 일본 콘텐츠가 한류 콘텐츠의 자리를 대신해 치고 올라왔다는 분석이다.
iHQ의 황기용 제작본부장은 "다시 열린 중국 시장은 선택과 집중을 할 것 같다"고 관측했다.
황 본부장은 "중국은 늘 한류를 규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시장이 열려도 한류 콘텐츠 수입 쿼터를 더 줄인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예전만큼 열어주지는 않을 듯하다"고 전망했다.
이어 "한한령 전에는 한류 콘텐츠 가격이 전반적으로 크게 상승했지만, 그 사이 중국 시장 상황이 변해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용석 SBS 드라마 EP는 "사드 때문에 한한령이 나온 것도 있지만, 한한령을 하고 싶었던 차에 사드가 핑계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 EP는 "한류 콘텐츠가 너무 잘돼서 중국이 단속하고 싶던 차였다는 해석도 많다"면서 "다시 시장이 열려도 예전만 같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한류스타 이광수의 소속사 킹콩바이스타쉽의 이진성 대표는 "시장이 다시 열리는 분위기는 맞는 듯하지만 과연 예전과 같은 모습일지는 좀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