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올드마린보이' 스틸컷)
보통 바다를 상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결 같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해수욕장의 바다, 혹은 열대어와 산호들이 가득한 동남아 휴양지의 맑은 초록빛 바다, 그것도 아니면 코발트빛의 짙푸른 지중해 바다. 어디든 삶의 고통보다는 낭만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업을 생계로 삼는 이에게 바다는 조금 다르다. 그곳은 때로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도, 생계를 뒤흔들 수도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삶을 연속할 수 있도록 하는 터전이다.
바닷 속을 제 집처럼 누비는 '머구리'는 해녀보다 더 깊은 수심에서 수산물을 채취한다. 주로 문어와 해삼, 멍게 등이 그들의 손에 의해 저 바다 깊은 곳에서 수면 위로 올라온다. 진모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올드마린보이'에는 머구리를 업으로 삼은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우주인처럼 동그란 철모를 쓰고 바다 밑을 누비는 박명호 씨는 네 명 식구들이 있는 가족의 가장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살아가는 그의 하루는 누구보다 단조롭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머구리질을 나갔다가 오후 1시경 돌아오면 점심을 먹고 운동을 한다. 그러면 또 하루가 저문다.
감독은 박명호 씨가 바다 밑 숲을 누비며 문어와 드잡이질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맑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바다 아래에서는 고요하지만 어느 때보다 치열한 사투가 펼쳐진다. 생계를 위한 이 고단한 사투를 위해 박명호 씨는 노란 산소 호스에만 의지해 60㎏의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을 걷는다. 지상과 바다를 연결하는 호스는 일종의 생명줄이다. 잘못해 끊어지면 무거운 잠수복에 짓눌려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 머구리질을 하던 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었고, 1명은 잠수병을 얻었다.
(사진=영화 '올드마린보이' 스틸컷)
그럼에도 박명호 씨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머구리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만이 자신이 이 땅에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 씨는 바다를 통해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온 가족을 데리고 한국땅에 왔다. 한국에 와 할 것이 없으면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배워놓은 것이 머구리질이었다.
감독은 박명호 씨와 그 가족들의 평범한 하루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머구리가 '생명'마저도 위험할 수 있는 극한직업임을 알게 되면 박 씨가 바닷 속으로 향하는 순간은 더 이상 아름답게도, 신비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향한 어떤 숭고한 걸음처럼 느껴진다. 발걸음 하나 하나에는 가족을 위해 죽음을 달고 사는 것도 감내하는 묵직한 사랑이 묻어 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두 노부부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인간의 따뜻한 알맹이를 찾아낸 것처럼, 진 감독은 이번에 다소 투박한 박명호 씨의 진심을 찾아낸다. 아들과 함께 해변에서 헤엄을 치는 그림자와 동향 사람들을 만나 즐거움을 나누는 한 때, 저도 어장이 열리는 날, 누구보다 일에 몰두한 모습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일면들로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숱한 풍파를 겪었지만 박 씨의 얼굴은 '올드마린보이'라는 제목답게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 그에게 삶은 단 한 번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머구리가 되어 바닷 속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