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가 만연한 성폭력에 시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제작 단계·직군별로 다양한 위계·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성폭력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죠. CBS노컷뉴스가 영화계 성폭력 실태와 그 해법을 전합니다. [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
① 성폭력 불감증 '영화판'…여태 "발등 불만 끄자" 땜질 ② "성폭력 침묵해야 일거리"…영화인들 '주홍글씨' 공포 ③ "남자처럼 일해도 여자라 성희롱"…영화판 엇나간 '형제애' ④ 노출신마저 눈칫밥에 떠밀려…"카메라 뒤 여자 늘어야"
|
(사진=자료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1. 갑자기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이 없던 장면 하나 만들어서 '조금 더 섹시하게 찍고 싶지 않냐', 스태프들 다 있는 데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요구를 해서 자기는 '죽어도 안 한다'고 했더니 스태프들이 '안 그래도 지금 일도 많고 피곤하고 짜증나는데…', 표정이 딱 그렇다는 거예요. '야, 그냥 찍고 넘어가자', 이런 표정이라는 거예요. 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죠. 자기만 되게 까탈스러운 여자가 되는 것처럼….#2. 저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9○년 때 시작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까 그렇게 그걸 인정하면 내가 이 바닥에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모욕적이고 수치스럽고 너무나 분노가…. 돌이켜보니까 굉장한 위험에 노출돼 있더라고요."#3. 그 일(성폭력·성희롱) 때문에 더 이상 그 감독하고는 일을 못한다고 한 거예요. 그 뒤에 이 친구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났냐면 '무책임하다' '여배우가 어느 날 사라졌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 배우하고는 어느 누구도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음부터 일이 끊긴 거예요. 자기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감독을 둘러싼 다른 스태프들의 철저한 침묵과 외면이 있었던 거죠."영화계 첫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2017년 6월 9일~9월 13일) 당시 영화인들의 증언이다. 영화계라고 내부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미 이와 관련한 정책도 여럿 실행 중이다. 결국 관건은 영화 현장 문화를 바꿔내는 데 있다고 관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 영화인은 "대개 '우리 현장에서는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 탓에 실제 피해가 발생하거나 누군가 드러내지 않는 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며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더라도 '언제든 내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기에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영화계 내 성폭력 예방교육·강사단을 운영하는 한편, 성범죄로 벌금형 이상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제작자·감독·프로듀서 등을 영화발전기금 사업 지원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과 한국영화 사측교섭단은 '2017년 영화산업 노사 임금·단체협약'에서 직장 내 성희롱·폭행 금지와 성희롱 예방교육을 명시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영화계 성평등센터 '든든'이 문을 열고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과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실태조사·연구, 피해자 상담과 법률·지원 등을 이어가고 있다. 든든에서는 올해(2월 1일~11월 30일) 관련 신고 29건을 접수하고 18건을 종결 처리했다.
영화산업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단체협약에 성희롱 교육 조항을 넣고 조합원을 상대로 교육을 진행하면서 분명히 조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만큼, 인식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해나갈 필요성을 절감한다"며 "제작사 입장에서 감독·배우의 교육 참여를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해하나, 제작사가 책임 의식을 갖고 그들의 교육 참여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는 점을 단체협약에 반영하면 현장에도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결국 한국 사회 전반의 인식 수준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영화 현장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짚어가면서 부조리를 직시할 때 해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별에 따라 노동 업무 내용이 가시적·비가시적으로 구분돼 있다"며 "이에 따라 여성에게는 '돌봄'과 '성'(性) 두 가지 역할이 늘 요구되고 판단의 대상이 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때 심판관은 대체로 남성인데, 옷차림부터 말투나 행동, 심지어 눈치보지 않고 얘기하는 것도 '여성스럽지 않다'고 지적하거나 작은 조직에서조차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이 여성 역할'이라는 인식은 영화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에 해당된다"며 "우리가 동등한 인간으로서 서로 다르게 지닌 가치를 나누고 보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특정한 성별에게 떠넘기는 짐은 무엇인가' '그것으로 인한 편견은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 "성폭력과 열악한 노동 문제는 결국 한 몸…적어도 계약으로 해결해야"
지난 3월 1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범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이 교수는 "특히 영화계는 직군별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한데 감독·제작자 등 실질적인 권한을 쥔 직군에는 남성 비율이, 미술·소품·분장·의상 등에는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며 "이러한 점이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현장의 전반적인 노동 환경과 밀접하게 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표준근로계약서 시행으로 그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환경이 점차 개선되고 있는 점은 성폭력 문제 해법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모습이다.
영화산업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오늘 20시간 이상 촬영했는데도 마무리짓지 못하면 내일도 그래야 하기에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박힐 수밖에 없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그것이 여성 배우·스태프 책임으로 곡해되고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노출 장면 등도 강행되는 것"이라며 "이 점에서 노동 환경과 성폭력 문제는 구조적으로 따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한 몸"이라고 강조했다.
안 위원장은 "우리가 표준근로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분명히 제한하자는 것처럼 그동안 간과해 온 성폭력 문제 역시 계약을 통해 해법을 구체화해야 한다"며 "배우 인지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적어도 할리우드처럼 노출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이뤄지고 그 장면은 어떻게 연출할 계획인지를 명시한 계약서를 도입함으로써 상호간에 사전 합의가 분명히 이뤄지고 현장에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특히 "지금 현장에서는 어쨌든 '카메라 뒤에 여성이 많아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영화산업노조 조합원 성비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7대 3인데, 전체 영화 현장도 비슷하다. 카메라 뒤에 조금이라도 여성이 늘면 현장도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이를 테면 촬영·조명 분야는 무거운 것을 다룬다는 명목으로 그동안 여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최근에는 팀원 5명 가운데 여성을 2명가량 고용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나영 교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노동이다. 근로계약과 관련한 대책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며 "현재는 개별적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나중에 사건이 불거져도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니다' '누구와 계약했으니 거기 가보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마련인데 이 부분을 정부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앞서 강조했듯이 이러한 흐름은 조직 문화가 바뀌고 시스템으로 자리잡아야만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성폭력 인식 개선을 위한 영화계 내부 교육 문제는 재차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 교수는 "팀장 1명 교체하면 조직 문화가 크게 바뀔 수 있는 단선적인 여타 회사 조직과 달리, 영화계는 복잡한 다층적 위계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만 처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따라서 적어도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자율적 모임을 활성화해 내부 문화를 바꿔내려는 자정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각 업종·직군별 노동조합은 그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