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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주치의' 가족, 남북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사회 일반

    '김구의 주치의' 가족, 남북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광복군 군의처장' 유진동 선생 아들 인터뷰
    김구 암살 뒤 중국행… 평양서 행방불명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중국서 근근이

    지난달 12일 중국 충칭시의 자택에서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인터뷰하는 유수동씨(사진=김형준 기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주치의였던 한국광복군 간부 故유진동 선생의 가족은 해방 뒤 남·북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중국에서 살아왔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유 선생의 아들 수동(64)씨를 지난달 12일 중국 충칭시(重庆市)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수동씨가 오랜 중국 생활로 한국어를 잊은 터라 인터뷰는 통역을 거쳐야 했다.

    그는 "아버지는 1940년대 김구 주석 곁에서 그와 광복군 대원들, 가족들의 건강 관리를 맡았다"며 "광복군 군의처장을 하면서도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여 어머니도 활동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백범일지 기록과 수동씨·임시정부기념관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충칭에 살던 한인들은 폐병으로 고생을 겪었다. 300여명 중 6~7년 동안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호흡기 전문의였던 유 선생은 환자들의 치료에 매진하다 과로로 피를 토하거나 치질·경추염 등의 질환까지 시달릴 정도로 헌신했다고 아들 수동씨는 기억했다.

    한국광복군 군의처장을 지낸 故유진동 선생(사진=유수동씨 제공)

     

    광복 뒤 유 선생은 김구 주석,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끊이질 않던 파벌 다툼 속에서 김구 주석이 암살되자 결국 상하이로 떠나게 됐다.

    중국에서의 삶도 평탄치 못했다. 공안이 계속 찾아와 유 선생을 신문하는 일이 잦았고, 병세가 악화됐던 유 선생은 일자리도 없어 중국인 아내와 수동씨를 포함한 6명의 자녀들도 무척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1957년 이들 가족은 새출발을 꿈꾸며 북한 국경을 넘었다. 북한 인사의 소개로 들어왔지만, 배급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 사회도 피바람이 불던 때였다. 김일성의 정적 세력이 줄줄이 숙청되던 상황에서 유 선생은 북한 당국에 의해 평양의 병원으로 옮겨진 뒤 행적이 끊겼다고 수동씨는 설명했다.

    유수동씨는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했다. "병원으로부터 아버지가 잘 있다는 편지 두 통을 받은 뒤로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고, 형들이 평양에 찾아갔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답변에 따져 묻다가 구금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진을 압수당했고 석탄 배급까지 끊겨버린 가족들은 6년 만에 두만강을 건너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국경을 건넜다가 공안에 붙잡혔지만, 중국 국적이었던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지난 2017년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유수동씨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난 문재인 대통령. 유씨는 지난 201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사진=유수동씨 제공)

     

    우리 정부는 지난 2007년 유진동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수동씨가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지 14년 만이었다.

    수동씨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나도 나라를 원망하진 않는다"며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NEWS: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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