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1899년 시린 겨울, 다섯 살 여자 아이 고만녜는 가족들 손에 이끌려 얼어붙은 두만강 너머 만주 북간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곳은 고만녜 가족의 새로운 삶의 둥지가 될 터였다.
딸을 그만 낳으라고 고만녜로 불린 아이는 아홉 남매 중 넷째였다. 아들 셋에 딸 여섯. 이름에 돌림자를 쓴 아들들과 달리 큰언니는 머리카락이 노랗다고 노랑녜, 여동생은 어린아이라고 그냥 어린아였다.
이 가족이 자리잡은 곳은 당대 북간도에서 가장 번성하던 명동촌. 고만녜가 열네 살 되던 1908년, 마을에 신식 학교가 들어섰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 가는 남동생을 매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서당 훈장인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울 수 없던 자기 처지를 다시금 떠올릴 뿐이었다.
고만녜는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일곱 살 남동생을 스승 삼아 글을 익히고 책을 읽으면서 어렵사리 배움을 이어갔다. 마을에 여학교가 생길 거란 소문이 돌았고, 고만녜는 학교에 갈 수 있으리란 희망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되던 1911년, 그녀는 부모 뜻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열여섯 살 중학생과 혼인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고만녜에게 "새로 생긴 여학교에 다니고 싶냐"고 물었다. 그렇게 그녀는 명동여학교에 입학했다. 그 사이 참된 이름도 찾았다. 어릴 적에는 어린아·개똥녜·데진녜·곱단이 등으로, 결혼 뒤에는 회령댁·종성댁·사동댁 등으로 불리우던 마을 여성 50여 명과 함께였다.
고만녜는 김신묵(1895~1990)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독립·민주·인권 운동가로는 물론 문익환·문동환 목사 어머니로도 이름을 남기게 될 그녀는, 명동여학교를 나와 어려운 형편에도 배신성경학교를 다녔다. 이후에도 여지없이 배움의 끈을 붙들었고, 교회와 야학 등에서 여성 지도자로 평생을 활약했다.
김신묵 여사는 생전 육성 증언을 통해 "당시 여자들은 (이름을 새로 지으려 보니) 호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정재면 목사님네 이름을 따랐다"며 "사모님 이름이 '신면'이고 그 '신'(信)자를 돌림자로 따랐다. 그래서 명동촌 여자 이름에 '믿을 신'자가 많았다. 학교 다니는 여성들은 전부 '신'자이고, 명동교회 다니는 여자들도 '신'자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 마을 여성 50여 명 이름, 하나같이 '믿을 신'자 돌림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한반도와 맞닿은 북간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명동촌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도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쳐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명동촌에서는 기독교와 함께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고, 뒤를 이어 서양 문물이 전해졌다. 평등과 자유에 바탕을 둔 근대 문화가 싹틀 터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앞서 김신묵 여사 증언에서 언급된 정재면(1884~1962) 목사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전도사인 이동휘(1873~1935) 등과 함께 북간도를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고, 이곳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애썼다.
1909년 명동촌 명동학교 교원으로 부임한 정재면은 "학교는 물론 마을 전체가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선생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당시 '북간도 대통령'으로 불리던 김약연(1868~1942)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3일 동안 협의한 끝에 대대로 신봉해 온 유교를 버리고 마을 전체가 기독교를 믿는 데 합의했다.
정 목사는 마을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명동학교를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고, 1909년 명동교회를 세웠다. 그렇게 명동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당대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를 전파했다. 1911년 명동여학교를 세우고 여성 교육에 앞장서 여성 지도자들을 육성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교회·학교에 다니던 명동촌 여성들은 모두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김신묵 여사처럼 이름 첫 자에 하나같이 '믿을 신'을 썼다. "하나님 안에서 한 자녀라는 뜻으로 '믿을 신'자를 돌림으로 사용해 이름을 짓자"는 정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신앙을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셈이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교회·학교를 다니면서 남녀평등사상이 확산됐고, 명동촌은 선진 사상과 문물을 흡수하면서 근대 공동체로 빠르게 변했다. 명동촌 여성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각자 이름으로 불렸다. 꿈은 '꿈'이라 불리울 때 비로소 꿈이 되는 법이다. 이름을 찾은 북간도 여성들은 엄연한 주체로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당대 명동촌은 '북간도 문화의 발상지'라 불릴 정도로 만주 일대에 자리한 한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명동학교에는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인근 지역은 물론 한반도,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왔다. 명동촌의 여권신장 흐름이 널리 확산됐으리라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우리 여자 사회에서도 동서 막론하고 후대 모범 허다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3·1운동으로 한민족 사이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들끓던 1919년 특별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된 것이다. 여성들이 작성한, 여성들의 독립선언서였다. 당시 일제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 선언서는 1919년 4월 8일 연해주에서 1000여 장을 보내 간도 지역에 배포됐다. 한반도와 도쿄 등지에도 보낸 흔적이 있단다.
1290자의 순 한글로 쓰인 이 독립선언서는 일제와 그 부역 세력을 "야만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우리 동포의 마음속에 품은 비수로 징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우리 여자 사회에서도 동서를 막론하고 후대에 모범될 만한 숙녀현원이 허다하다"고 못박는다.
이 선언서는 "살아서 독립 깃발 아래 활발한 새 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고함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 의무가 아닌가"라며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가슴 깊이 우러나는 붉은 마음으로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오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않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 독립 만만세"라고 호소하고 있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해설에 따르면, 이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9월 중국 지린(吉林) 부근 훈춘(琿春)에서 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각한 여성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사례는 북간도 명동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곳 기독교 여성들을 주축으로 조직된 여전도회, 명동여자기독청년회, 여자비밀결사대가 대표적이다. 특히 1916년 김신묵 여사 등 7명이 꾸린 여자비밀결사대는 모금운동을 통해 독립군을 지원했다.
김신묵 여사 손녀이자 동화작가인 문영미 씨는, 김 여사 증언 등으로 북간도 독립운동과 기독교 운동사를 엮은 책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삼인, 2006)에서 "할머니는 나이가 드신 탓에 자주 옆길로 새기도 했지만, 항상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을 나열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다"며 "언뜻 정돈되지 않고 연관이 없는 이야기 같아도 그 안에는 일상생활의 풍습이나 문화가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되었다. 여성들은 주변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③ 인삼밭 들어서 잊힌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④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⑤ 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⑥ 딸 그만 낳으라고 '고만녜'가 북간도서 되찾은 꿈 <계속>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