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사전투표소 앞에서 열린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장애인의 완전한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리가 투표를 못 하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닙니다. 발달장애인도 투표권을 갖고 있고, 찍고 싶은 사람을 찍어야 하는데 투표 용지에 후보자 사진이나 정당 로고가 없어 투표하기가 힘듭니다. 그림투표용지를 도입해 우리도 쉽게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표 도장만 찍는다고 선거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당연히 가지는 참정권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아닌, 정당하고 합리적인 선거 제도의 개선이 절실하다.
그간 여러 차례 선거가 치러지고 유권자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이 있었지만,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관련법 개정은 전혀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피플퍼스트,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6개 단체는 "장애인 당사자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참정권을 바로잡아달라"고 주장했다
◇전국 사전 투표소 3500여곳 中 270 곳, 이동 약자 접근성↓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사전투표소 앞에서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된 날이다.
앞서 이들 단체는 △그림투표용지 도입 △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알기 쉬운 선거 정보제공 △선거 전 과정에서 수어 통역과 자막제공 의무화 △모든 사람의 접근이 가능한 투표소 선정 △장애인 거주 시설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 등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참정권을 위해 선거관리위원회가 모든 조치를 이행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애인이 후보를 살펴보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문턱은 높기만 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전체 투표소 중 20% 가까이는 이동 약자에게 접근이 어려웠다. 이에 2019년 투표소를 이동 약자의 투표소 접근 편의를 위해 "1층 또는 승강기 등 편의시설이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공직선거법이 개정됐다. 하지만 '적절한 장소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예외조항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투표소에 온 장애인들을 실망시켰다.
실제 전국의 사전 투표소 3500곳 가운데 270곳이 1층도 아닌 데다 승강기까지 없어 장애인 접근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장애인 유권자가 가장 많은 서울은 사전 투표소의 21%가 장애인이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 있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그동안 장애인도 평등하게 차별받지 않고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변화된 게 많지 않다"고 꼬집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일인 10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청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발달장애인 '그림투표용지' 촉구, 시각장애인 코로나19 에 비닐장갑, "점자 못 읽어"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읽기 쉬운 공보물' 제작과 후보자의 사진이나 정당의 로고를 투표용지에 기입하는 '그림투표용지' 도입을 주장했으나, 이 역시 아직 발달장애인을 위한 선거제도는 개선되지 않았다.
문윤경 대구피플퍼스트 활동가는 "선거철마다 오는 공보물은 발달장애인에게 이해하기 어렵게 제공돼 아무 곳에 무작정 찍는 발달장애인도 있다"면서 "발달장애인도 원하는 후보를 찍어야 하는데 부모님이나 시설 교사가 옆에서 간섭하기도해, 알아보기 쉬운 투표용지와 공보물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각장애인은 장애 유형을 고려한 점자 형태의 선거공보물에도 아쉬움이 많다. 점자 형태의 선거공보물은 묵자의 3배 분량이지만, 일반 선거공보물과 동일하게 매수가 제한돼 있어 선거 정보 내용이 중간에 끊기는 등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점자투표 보조 용구에 대한 어려움도 함께 나타났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진행하게 되면서 점자투표 보조 용구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곽남희 활동가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진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비닐장갑을 끼면 점자를 읽을 수 없어 투표 보조 용구가 무의미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수어 통역이 모든 투표소에 제공되지 않아 투표 절차에 어려움을 겪는 등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문제도 함께 꼬집었다.
서울시의 경우, 사전투표소 총 424곳 중 단 25곳에서만 수어 통역사가 배치됐다. 선거 당일 투표소 2252개 중 49곳만 수어 통역사가 배치돼 현장 투표소에서 안내와 설명을 듣는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종운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의원은 수화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투표 한번 하려는데 20분 넘게 걸렸다"면서 "청각 장애인도 제대로 된 국회의원을 뽑고, 정당한 한 표를 행사하고 싶다"고 바람을 밝혔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사전투표소 앞에서 열린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장애인의 완전한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가 그림 투표용지 제작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시, 2252개 투표소 장애인 편의시설 점검…"장애인 불편 없도록 하겠다"서울시는 오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에서 장애인이 불편 없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관내 2252개 전 투표소의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를 점검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투표소 설치 위치와 접근로 편의성, 주 출입구 폭 적정성,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설치 여부, 장애인 화장실 설치, 주 출입문 점형 블록 설치, 휠체어 장애인 투표 가능 여부 등을 조사했다"며 "문제점을 사전에 시정토록 해 장애인이 투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투표소가 건물 2층이나 3층에 설치돼 있으나 승강기가 없으면, 1층 주 출입구 옆에 임시 투표소를 설치토록 할 방침이다. 또 출입구 경사로가 급하거나 계단 높이 차이가 클 경우 임시경사로를 설치토록 하고, 투표 당일 장애인 안내 도우미를 배치할 예정이다.
정진우 서울시 복지기획관은 "장애인 당사자로 구성된 모니터링 요원이 투표소별 장애인 편의시설을 점검하기 때문에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조사가 가능하다"며 "사전에 불편한 사항을 차단해 장애인의 선거 참여를 활성화하고 이들의 투표권 행사에 어려움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