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조주빈이 검거된 지 100일이 넘었다. 온라인에서 은밀히 자행되던 성착취 범죄에 경악한 우리 사회는 이후 숱한 대책을 쏟아냈지만, '실제' 변화가 있었는지 묻는다면 확신에 찬 답은 어려워 보인다. CBS노컷뉴스는 연속 기획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현 상황을 점검하고, 이를 뿌리 뽑기 위한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봤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①'박사' 조주빈 검거 100일…달라진 檢警, 그러나 여전한 법원 ②야한 채팅할 사람…미성년자 일상 파고드는 그루밍 ③텔레그램 못 잡는 'n번방 방지법'이 n번방 방지할까? (계속) |
(사진=연합뉴스)
◇'제2의 n번방 막는다'…플랫폼 사업자 '사전 필터링' 의무화해⓶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가통신사업자는 불법촬영물 등의 유통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하여야 한다.
⓷ 누구든지 정당한 권한 없이 고의 또는 과실로 제2항에 따른 기술적 조치를 제거·변경하거나 우회하는 등의 방법으로 무력화여서는 아니 된다.
⓸ 제2항에 따라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하여야 하는 부가통신사업자는 제2항에 따른 기술적 조치의 운영·관리 실태를 시스템에 자동으로 기록되도록 하고, 이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간 동안 보관하여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 제22조의 5] 중-
재적 177인 중 찬성 174인, 기권 3인. 지난달 20일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20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n번방'의 주범 중 한 명인 '박사' 조주빈이 검거된 지 약 두 달 만에,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이 대표발의한 지는 20일이 채 안 돼 입법 최종문턱을 넘은 것이다.
기존 법안과 구별되는 '핵심'은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제3자의 '신고'가 없더라도 불법촬영물 등의 유통을 '사전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필터링을 법적 의무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인터넷으로 콘텐츠나 플랫폼을 제공하는 부가통신사업자들은 불법촬영물의 유통을 방지할 관리책임자를 지정하는 것은 물론, 관련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에 매년 1월 '투명성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됐다.
이같은 책임을 '의도적으로' 다하지 않을 경우, 해당 업체는 매출액의 최대 3%에 이르는 과징금을 물게 되고, 매출액이 없거나 산정하기 어렵더라도 최대 1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스크리닝'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현저히 부족하거나 사업주가 상당히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경우 등에 한해서만 의무조치를 위반했을 때 예외로 참작될 수 있다.
이 의원이 '제2의 n번방'을 막자며 손질한 관련법은 '방송통신 3법' 중 2가지인 전기통신사업법과 정보통신망법이다. 이는 'n번방' 관련 첫 성과인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형법·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이은 후속 조치다.
앞서 국회는 지난 4월 29일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하거나 구입, 저장·시청만 해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등을 재석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만, 현장에서 당장 법률의 제재를 받게 된 사업주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추진됐다는 '졸속' 논란도 일었다. 실제로 개정안이 시행되는 시점부터 플랫폼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 의무를 지게 된 사업주들은 집단 반발에 나섰다. 해당 법안에서 명시한 사업주들의 책임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12일 한국인터넷기업협회·벤처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체감규제포럼 등 4개 단체는 "공청회 등 제대로 된 의견수렴 과정도 없이 급하게 개정안이 처리되고 있다"며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술적 조치를 취하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으나, 지금은 과도하게 포괄적이기 때문에 이대로 (법이) 통과되면 위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성착취물이 순식간에 확산되는 온라인 플랫폼의 특성상 '2차 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왔던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는 '이제 시작'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달 18일 성명을 통해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들은 지금까지 단순히 플랫폼을 제공했을 뿐, 개인들의 플랫폼 이용에 대해 사업자가 전부 개입할 수는 없다는 어불성설의 논리로 방어를 이어왔다"며 "소라넷부터 웹하드 카르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까지 온라인 플랫폼에서 촬영물을 이용한 성착취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동안 플랫폼에게 지워졌던 책임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온라인 공간은 결코 여성들에게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플랫폼 사업자가 디지털 성범죄를 방조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려온 동안 그 플랫폼 속에서 여성들은 성적으로 이용되고 거래되어 왔다"며 "금번 개정안은 이런 착취가 가능할 수 있도록 기술을 제공해온 사업자들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묻는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관내 여성 36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울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실태 및 인식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안으로 △가해자 처벌 강화를 위한 법제 정비(78.5%) △디지털 성범죄 및 온라인 이용 시민교육(57.3%) △피해감시 모니터링 및 단속(50.2%)과 함께 '유통 플랫폼 운영자 규제'(35.2%)를 꼽았다.
(사진=연합뉴스)
◇텔레그램은 못 잡는데 'n번방 방지법'?…'개인 사찰' 논란도'n번방 방지법'을 둘러싸고 가장 논쟁이 불거진 대목은 정작 n번방의 무대였던 텔레그램에 대해서는 법을 집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이번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5조 2항에는 '국외에서 이뤄진 행위도 국내 시장 또는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이 법을 적용한다'는 역외규정이 포함됐다. 즉 해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국내에 주소나 영업지가 없는 사업자들에 대해서는 이용자 보호와 자료 제출업무를 대신하는 '국내 대리인'을 서면으로 지정토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텔레그램은 본사의 소재도 파악되지 않아 사실상 당국의 제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같은 한계를 의식한 듯 방통위 한상혁 위원장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회의에서 "국내 대리인 지정제도가 입법되면 (실제 집행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역외적용 규정을 둔다 해도 집행력과는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이를 두고 "텔레그램도 처벌할 수 없는 법안이 어떻게 'n번방 방지법'일 수 있냐", "국내 사업자만 적용받는 역차별"이란 비판이 잇따랐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합법적으로' 이용자들의 대화와 정보를 엿보는 '개인 사찰'을 조장하는 법안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사업자들이 취해야 할 조치를 '대통령령'으로 정하겠다고 명시한 문구 역시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권리침해 소지가 크다는 지적 또한 제기된다.
시민단체 오픈넷의 김가연 변호사는 "신고 없이 불법촬영물을 알아서 유통방지하라는 의무가 신고 후 촬영물을 즉시 안 내리는 것보다 더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며 "방통위는 지속적으로 비공개 대화방에는 (관리 의무가) 적용이 안된다고 하는데 그럼 이게 왜 n번방 방지법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범죄에 사용되는 도구를 제공했다고 해서 사업자들에게 모두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며 "차 사고가 날 때마다 자동차 회사들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냐를 생각하면 아니지 않나. 결국 사업자들에게 다 책임을 떠넘긴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앞서 "어떤 방식의 필터링을 적용하든 사업자가 불법촬영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용자가 공유하는 정보를 다 들여다봐야 한다"고 'n번방 방지법' 반대성명을 발표한 오픈넷은 해당법안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
◇"성착취물 유통되는 국내 플랫폼 단속은 당연…AI 도입도 필요"다만 국내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공간 정화'의 책임을 법적으로 명기한 것만으로도 발의 이유는 충분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나중에 텔레그램 등 해외 서버를 둔 메신저로 교신 장소를 옮기더라도 가해자가 처음 피해자를 유인하는 곳은 여전히 국내에 기반을 둔 플랫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n번방 방지법으로) '텔레그램은 처벌 못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텔레그램'만' 처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라며 "지금 n번방 방지법을 갖고 잘했네, 못했네를 따지는 것은 애당초 이런 법안을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라고 일축했다.
이어 "여자아이들을 꼬드기는 앱이 수백 개인데 내국인이 불법촬영물을 통해 범죄수익을 내는 업체를 처벌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를 처벌하나"라며 "(관리조치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 역시 인스턴트 기술들이 마구 개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법률 개정은 몇 년에 한 번 될까 말까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n번방 관계자들의 재판을 참관하며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부소장 역시 'n번방 방지법'은 문제해결로 가는 '첫 단추'일 뿐이라는 의견을 보탰다. 입법 취지에 모두가 공감하는 이상 이 법안을 토대로 '새로고침'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 부소장은 "텔레그램은 적용이 안되지 않느냐고 냉소할 일은 아니다"라며 "그동안 유수의 해외플랫폼들이 '국내에 사업자권한이 없다', '본사와 소통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왔지만 (n번방 방지법에) 국내 대리인 제도가 생기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아울러 "지금도 피해촬영물이 너무 많고, 그것으로 돈을 벌어온 가해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원(原) 피해영상을 편집, 가공한 영상들까지 찾아낼 수 있는 AI(인공지능)을 활용한 선제적 조치도 법제화되길 바란다. 플랫폼들 역시 신고나 채증에 있어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공은 21대 국회로 넘어갔다. 'n번방 방지법'이 단발성 입법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성범죄 척결이라는 궁극적 목적의 완수에 가까워지려면, 모두의 눈과 지속적 관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