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포스터. 판씨네마㈜ 제공
영화 '미나리'가 결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보수성과 폐쇄성을 넘지 못했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는 3일(현지 시간) 제78회 골든글로브 후보작(자)을 발표했다. 당초 예상대로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작품상 등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만 오르게 됐다.
미국 비평가협회 등을 휩쓸며 연기상 20관왕의 대기록을 쓴 윤여정도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제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골든글로브 홈페이지 캡처.
◇ 보수성·배타성 짙은 골든글로브의 한계골든글로브는 '50% 이상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할 경우 외국어영화로 분류한다'는 지침을 갖고 있는데, '미나리'는 한국어 대사가 70%에 달한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연출한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쫓아 미 아칸소주(州) 농장으로 건너간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미나리'는 미국 영화다. '문라이트' '노예 12년' 등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에 참여한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플랜B가 제작을 담당했으며, '문라이트' '룸' '레이디 버드' '더 랍스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 수차례 오스카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이끈 A24가 북미 배급을 맡았다.
'미나리'처럼 외국어 대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함에도 외국어영화로 분류되지 않은 사례도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작품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대사 대부분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이뤄졌음에도 2010년 열린 제6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배우 크리스토프 발츠는 이 작품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결국 '미나리'는 온전한 미국 작품임에도 비(非)백인·비(非) 영어 작품이라는 점에서 패널티를 얻은 것이다.
이처럼 골든글로브는 보수성과 배타성으로도 유명하다. 앞서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의 '페어웰' 역시 중국어가 많이 사용됐다는 이유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들며 비판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골든글로브의 한계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인 아시아 배우들에게 수상의 기회를 주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했다.
한국계 캐나다 배우 산드라 오는 '킬링 이브'로 76회 골든글로브 TV 시리즈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아시아계 여배우로는 NBC 드라마 '쇼군'(1980)의 시마다 요코 이후 두 번째다. 영화 부문에서는 77회 시상식에서 이르러서야 영화 '더 페어웰'의 배우 아콰피나가 아시아계 배우로서는 최초로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맨 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한예리, 스티븐 연, 윤여정,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정이삭 감독. 판씨네마㈜ 제공
◇ 美 여론도 부정적…'미나리' 외국어영화상 후보 진출에 "놀라운 누락"이번 '미나리'의 외국어 영화상 후보 진출 결과를 두고 미국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높은 상황이다.
미국 매체 인사이더는 "'미나리'는 미국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 후보에 올랐다"며 "사람들은 '미나리'가 왜 작품상 후보로 부적격이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은 골든글로브가 후보 목록에 (해당 작품이) 어느 나라 영화인지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우스꽝스럽게 됐다"며 "'미나리' 아래 '미국'이라고 나온다"고 비판했다.
ABC 드라마 '아메리칸 크라임', 넷플릭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에디터와 훌루 시리즈 '런어웨이즈' 등의 극본을 쓴 작가이자 프로듀서 커크 A. 무어는 SNS에 "'미나리'는 외국어 영화가 아니다"라고 일침했다.
영화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피어스 콘란도 SNS를 통해 "'미나리'는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을 뿐이다. 각본상, 감독상, 특히 연기상의 누락이 눈에 띈다"며 "윤여정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미나리'에서 그녀의 뛰어난 활약과 놀라운 수상 행진을 감안한다면 이는 놀라운 누락"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골든글로브는 한 번도 진보의 길잡이가 된 적이 없다"며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고 비판했다.
영화 '미나리' 수상 및 노미네이트 기록. 판씨네마㈜ 제공
◇ '미나리', 골든글로브 벽 넘어 오스카 새 기록 세울까 관심 집중이제 남은 것은 '미나리'가 진보보다 퇴보를 선택한 골든글로브의 벽을 넘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새 기록을 세울 것인지 여부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작품상 수상 자격에 다양성 조항을 추가하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간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 '남성' 위주로 이뤄져 '백인들만의 잔치' '화이트 오스카'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오스카 쏘 화이트'(#OscarSoWhite)라는 해시태그까지 탄생시켰다.
한국 영화 최초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이어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에서 4관왕에 오르는 '이변'으로 전 세계를 놀래켰다. 이를 두고 아카데미가 기존의 오명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라는 시각도 있었다.
백인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기조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카데미는 다양한 국적과 성별을 가진 신입회원 확보에 나선 바 있다. 이에 아직도 변화하지 못한 골든글로브 대신 '미나리'가 오스카에서 '기생충'에 이어 또 다른 역사를 쓸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영화 '미나리' 속 배우 윤여정. 판씨네마㈜ 제공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 후보에 오를 수 있을 것인지도 올해 오스카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윤여정은 전미 비평가위원회부터 LA, 보스턴,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콜럼버스, 그레이터 웨스턴 뉴욕, 샌디에이고 등 미국 내 연기상 20관왕을 달성하며 미국 영화계를 휩쓸고 있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오스카 예측 기사를 통해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버라이어티는 "'미나리'의 사랑스러운 할머니 역을 맡은 윤여정이 비평가상을 주도하고 있다"며 "만약 윤여정이 수상한다면 1957년 '사요나라'의 일본 배우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오스카 역사상 조연상을 수상한 두 번째 아시아 여배우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