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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2020.11.23 A씨의 석명 신청에 대한 국가 측 답변서 |
[처벌불원서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 및 그에 대한 판단이 상이한 이유]
1. 형사소송법에 처벌불원서의 작성 경위에 대하여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첨부서면 등의 제출에 관하여 명시적인 규정은 없습니다.
2. 따라서 처벌불원서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겨져 있다할 것이고, 이는 법관 또는 사건마다 달리 판단할 수도 있다할 것입니다.
3. 이 사건 처벌불원서에는 피해자의 서명·무인 등이 있고, 변호인이 제출하였다는 점에서 그 진정성립을 인정할 만한 서면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
법관의 자유판단이 명백히 잘못됐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요? 법관이 법대로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자유판단을 한다는 것인지 의문부터 드는 분도 있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법에 세상만사 모든 일을 구체적으로 정해둘 수 없으니 법은 간결합니다. 법을 적용하는 법관이 그 법조항의 과거 적용 사례(판례)나 입법의 취지 등을 토대로,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헌법의 여러 가치에 부합하게 판단을 내리게 되죠. 법조항 자체나 판례의 공백이 큰 영역이라면 법관의 '자유판단·자유심증·재량판단'이 더욱 발휘될 겁니다.
위에 언급한 처벌불원서에 대해서도 그 진위여부 판단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겨져 있다'고 합니다. 판사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국개배상 소송에서 국가 측 소송수행자가 보내온 답변 내용입니다.
연합뉴스
◇지적장애인이 쓴 처벌불원서 검증 없이 가해자 '공소기각'한 판사지적장애 2급인 A씨는 이른바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외엔 한글을 읽지 못하고 생년월일은 알지만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외우진 못하죠. A씨를 약 13년간 무임금으로 착취한 염전주를 처벌하기 위한 형사소송이 진행 중이던 때 가해자 측은 A씨를 찾아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인쇄된 문서(처벌불원서)에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고 지장을 찍게 했습니다.
가해자 측 변호인은 이를 법원에 제출했고, 재판부는 아무런 검증 없이 3일 만에 선고를 내렸습니다. A씨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되면서 '반의사불벌죄'인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는 공소기각으로 처벌할 수 없게 됐습니다. 영리유인·준사기 혐의는 유죄였지만 처벌불원서 덕분에 가해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상한 점은 당시 재판을 진행한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가 A씨 외의 다른 염전노예 피해자들이 쓴 처벌불원서는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증언한 경우에도, 피해자의 지적장애를 이유로 처벌불원 의사를 단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장애가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아동·청소년이나 지속적인 폭력, 경제상황 등으로 취약한 피해자들이 쓴 처벌불원서는 그 진위여부를 엄밀히 따져야 하기 때문이죠.
2021.1.15. 서울중앙지법 A씨 국가배상소송 결심 중 A씨 측 의견진술 |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 "비장애인을 전제로 했을 때도 재판부의 처벌불원서 확인절차가 문제가 있다고 계속 말씀을 드렸는데요. 더 나아가 원고(A씨)가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재판부가 비장애인과 동일한 검증절차를 거친 것은 장애인 간접차별의 성격이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법원은 지적장애인 명의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됐을 때 그것이 진짜 지적장애인의 의사인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는 겁니다." |
법관의 자유판단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 사법체계는 3심제를 두고 있습니다. 염전노예 사건도 2심을 맡게 된 광주고법에서 잘못을 일부 바로잡았습니다. "피고인(염전주)은 당심에 이르도록 피해자(A씨)와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며 1심이 인정한 '처벌불원서'가 효력이 없다고 배척한 것이죠.
그런데 처벌불원서 때문에 공소기각된 혐의에 대해 검찰도 제대로 항소하지 않으면서, 2심 재판부가 이를 유죄로 돌이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1심 재판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A씨를 노예처럼 부린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게 된 셈인데, 법원 내부의 조사나 징계도 없었죠.
A씨 측은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 당시 1심 판사들을 증인으로 불렀지만 증인신청조차 기각됐습니다. 가까스로 법원으로부터 받은 서면답변에는 △처벌불원서의 진위 확인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이 없음 △진위여부는 법관의 자유판단 영역 △피해자 서명·무인(손가락 도장)이 있고 (가해자의) 변호인이 제출해 진정성립을 인정했을 것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일부 답변은 추측을 한 듯한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어 해당 판사들이 직접 진술한 내용인지조차 불분명합니다.
◇부실재판한 법관 감독에 관심 없는 법원…국회도 견제 소홀A씨 처벌불원서가 부실한 판단을 받게 된 배경에 대해 일각에선 당시 가해자의 변호인이 목포지원장을 마치고 개업한 전관 변호사인 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전관예우' 때문 아니냐는 의심인데, 충격적인 뉴스 등으로 여론의 관심이 쏠려 법원이 진상 파악에 나서거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이 진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턱대고 법관의 자질이나 부정한 결탁을 의심해선 안되겠지만, 법관에 대해 이러한 내·외부의 견제와 감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법관징계법상 최고의 징계수위는 '정직 1년'인데, 2015년 사채업자에게 억대 금품을 받은 최민호 판사가 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1956년 법관징계법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은 정직 1년 징계에 처해질만한 문제 판사가 전혀 없었던 걸까요?
또 지난 4일에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가 법관을 탄핵소추 했습니다. 법관징계법의 최고 징계수위가 '정직 1년' 뿐이고 면직이나 해직, 파면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은 독립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면서도, 국회가 탄핵으로 견제해 균형을 맞추라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국회마저 감시와 견제할 책임을 방기하면서 법관은 마치 신과 같은 지위에 올랐죠.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도 탄핵되는 시대인데 말입니다.
그나마 사법농단 사태는 이탄희 판사가 사표를 던지면서 진상 파악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의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에서 각종 재판개입 행위가 드러났을 때도 판사들은 자유판단·자유심증·재량판단에 따라 결정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
2020.2.14. 임성근 부장판사 1심 판결문 중 피고인 측 변론요지 |
"피고인(임성근)의 직권남용(재판개입)의 상대방인 판사들은 피고인의 말을 들은 후 그 취지에 공감해 재판부 합의를 거치거나 주변 판사들과 상의한 후 독립해 판단한 것입니다." |
법원이 사법농단 연루자에게 준 징계 수위 중 가장 높은 것은 '정직 6개월'입니다. 그마저도 서너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견책이나 몇 개월 감봉, 대부분은 불문하거나 늦은 징계로 시효가 도과해 처벌을 못했습니다.
정치적 파장이 크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사법농단' 판사들에 대한 처분도 이처럼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물며 일반 시민들이 관련된 비교적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에서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판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법관들에 대해 법원이 앞으로도 자정을 하지 못한다면, 무언가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나라와 법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법관징계법에는 해임, 파면을 비롯해 직급강등, 근무지 이동 등 여러 중징계가 규정돼 있습니다.
법원의 자구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국회의 법관 탄핵을 조금 더 쉽게 하는 법개정도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빈번한 탄핵이 사법독립을 흔들 것이라는 우려도 상당하지만 현재까지 법관 탄핵이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빈번한 탄핵'에 대한 우려는 과장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A씨의 국가배상소송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8-2부(이순형 부장판사)는 오는 16일 국가(법관)의 책임을 인정할 것인지 판결을 선고합니다. A씨 사건에선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판사들이 직접 법정 증언대에 나와 (혹은 상세한 판결을 통해) 자신의 '자유판단'의 배경을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국민에게서 심판자의 지위를 잠시 넘겨받은 법관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