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과 철'에서 희주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시은. 찬란 제공
한밤중, 인적 드문 국도에서 자동차 2대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의식불명이 된다. 그 사고로 누군가는 가해자의 아내가 됐고, 누군가는 피해자의 아내가 됐다. 희주는 가해자의 아내다.
가해자의 아내라는 무게가 희주의 삶을 고단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희주의 얼굴과 감정은 영화 내내 관객을 사로잡는다. 희주의 안에 들어앉은 복잡한 내면이 하나둘 밖으로 드러나며 만드는 감정의 파고에 희주도 관객도 휩쓸린다.
'빛과 철'의 배종대 감독은 김시은이 누구보다 강한 폭발력을 가진 배우였고, 끝까지 자신을 쏟아내며 몰입해 나갔다고 말했다. 김시은 역시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기 모습을 마주했다고 이야기했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배우 김시은으로부터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 '빛과 철' 스틸컷. 찬란 제공
◇ 깊은 내공 갈무리한 염혜란, 그와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빛과 철'은 남편들의 교통사고로 얽히게 된 두 여자와 그들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뀌기도 하고, 무언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희주, 영남(염혜란), 은영(박지후) 세 인물의 모습에서 미스터리함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영화다.
촬영 전 대본 리딩조차 하지 않은 채 배우들의 만남을 막은 감독의 원칙으로 인해 김시은은 현장에서야 염혜란을 만날 수 있었다. 김시은은 "현장에서 혜란 선배는 정말 초반 영남의 모습처럼 되게 따뜻하다"면서도 염혜란을 '호랑이'에 비유했다.
"되게 내공이 깊은, 연기 잘하는 배우를 보면 센 아우라가 있어요. 혜란 선배는 겉으로는 안 그런데 그 안에 조용한 호랑이가 숨어 있는 느낌이에요. 진짜 아우라가 막 뿜어져 나온다기보다는 숨어 있는 에너지가 되게 큰 거죠. 포근하고 온화한 사람인 거 같은데 정말 무서운 에너지를 가진 배우예요."그는 "현장에서는 희주로서 선배님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래서 현장에서보다 영화가 다 완성되고 호흡을 맞추지 않은 선배님의 장면을 보면서 배우로서 존경심이 많이 들었다"며 "선배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빛과 철' 스틸컷. 찬란 제공
김시은은 염혜란과 호흡을 맞춘 장면 중 영남이 공장에 있는 희주를 찾아와 탈의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염혜란과 실제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때 희주가 영남을 향해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하지 못했던 말, 머릿속에 지나간 오만가지 질문 등을 응축시켜서 화살 쏘아대듯이 날카롭게 쏟아내요. 그 말들이 통쾌하고 짜릿했어요. 그동안 계속 달팽이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숨고 수축해 있다가 그때서야 비로소 어깨를 펴고 말을 하죠."영남만큼 중요한 인물은 은영이다. 은영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진실을 고백하며 희주를 질주하게 만든다. 은영 역의 박지후에 대해 "너무 기대되는 배우"라고 떠올렸다. 그는 "(박지후는) 현장에서 정말 은영으로서 존재했다"며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지후가 성인이 되고 앞으로 해나갈 연기가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박지후와 함께한 장면 중 "은영에게 라면을 끓여준 후 '밥 말아줄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했다.
영화 '빛과 철'에서 희주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시은. 찬란 제공
배우 김시은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 '빛과 철이번 '빛과 철'에서 김시은은 깊고 깊은 감정을 끄집어내 극한까지 강하게 맞부딪혔다. 희주가 나오는 장면마다 감정적으로 힘들기에 관객들이 희주를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했다. 김시은은 자신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정말 나도 모르는 나의 얼굴을 본 거 같다"고 말했다.
"'나한테 저런 모습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감독님께서 잘 끄집어내 주신 거 같아요. 제게 쾌활한 부분도 많은데 현장에서는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있는 어둠은 물론 없는 어둠까지 모든 걸 다 뽑아서 쓴 것 같아요."그의 말마따나 모든 걸 다 끌어내 희주를 완성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울기보다는 물기를 택하라"고 말하던 글로리 호텔 직원 귀단을 기억하는 시청자에게도, 영화 '귀향'에서 위안소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는 정민을 돕는 분숙을 기억하는 관객에게도 '빛과 철'의 희주는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 '빛과 철' 스틸컷. 찬란 제공
김시은이 그동안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는 물론 드라마에서 시대극부터 현대물까지 다양한 장르, 다양한 역할을 통해 차곡차곡 쌓아 온 자신만의 길이 '빛과 철'을 통해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났다. 그는 "'빛과 철'이 정말 내게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빛과 철'에 도전하면서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한계의 크기를 맛본 느낌이에요. 내가 이 정도를 할 수 있구나 싶었고, 넓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빛과 철'을 찍으면서 경험한 게 제게는 뼈와 살처럼 붙어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서 이 변화는 저만 아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남들이 보기엔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분명 달라진 포인트가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만나게 될 작품들이 기대돼요."
김시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김시은이라는 사람의 연기 잘하는 모습을 인정받고 싶었다면, 지금은 조그마한 변화라도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과정을 밟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크든 작든 모든 주어진 작품이 소중하고, 작품과 자신이 연기할 인물에게 온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다고 말했다.
'빛과 철'을 봤거나 혹은 앞으로 볼 관객들이 이것만큼은 꼭 가슴에 안고 극장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지 물었다.
"'빛과 철'은 정답을 알려준다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을 최선을 다해 던졌으니 이에 관한 생각은 온전히 관객들의 몫이에요. 다만, 우리가 던진 질문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신없이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휩쓸리다가 딱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숨이 트이는 것 같은 경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화지 않을까 싶어요. 코로나 시대지만, 영화관에 조심스레 오셔서 그런 경험을 해보시길 권해봅니다."(웃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