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제공
JTBC 새 드라마 '설강화'가 방송도 전에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 조기 종영·제작 중단을 이끌어 낸 시청자 항의가 이번에는 '설강화'를 겨냥했다. 아직 유가족·피해자 등이 남아 있는 민주화 운동 역사가 자칫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논란이 크게 번지자 JTBC는 지난 26일 공식 입장을 내놨다. 요지는 '설강화'가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JTBC는 "미완성 시놉시스의 일부가 온라인에 유출되면서 앞뒤 맥락 없는 특정 문장을 토대로 각종 비난이 이어졌지만 이는 억측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또 '설강화'에 대해 "80년대 군사정권을 배경으로 남북 대치 상황에서의 대선정국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이고, 그 회오리 속에 희생되는 청춘 남녀들의 멜로드라마"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JTBC가 '미완성 시놉시스'라고 밝힌 내용이 '설강화'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이미 지난해부터 '조선구마사'와 '설강화'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역사 왜곡이 우려되는 작품으로 함께 거론돼 왔다. 당시 유출된 시놉시스로 '조선구마사'는 조선 건국이 바티칸 도움을 받는다는 설정, '설강화'는 남파 간첩이 운동권 학생으로 위장하는 설정 등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설강화'보다 일찍 촬영을 시작한 '조선구마사'는 언론을 통해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수정 작업을 마쳤다"고 자신있게 공언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물은 논란 투성이였다. 중국식 소품부터 주요 역사적 인물 묘사까지 동북공정과 역사 왜곡 문제로 일파만파 번졌다.
이미 '조선구마사' 전례가 시청자들에게 남아 있는 까닭에 '설강화'가 과연 이를 극복할 만한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관건이다. 벌써부터 '조선구마사'처럼 방송 편성·해외 OTT 수출이 되기 전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설강화' 촬영 중지 관련 청원은 시작 4일 만에 13만명을 돌파했다.
실제 공식 보도자료에서 남자 주인공의 '간첩 설정'은 찾아 볼 수 없고 그 정체는 베일에 감춰져 있다. '설강화' 측은 배우 정해인이 맡는 임수호 역에 대해 '재독교포 출신의 어딘가 비밀스러운 매력까지 갖춘 남자'로 소개한다.
19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간첩죄로 기소된 23명.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방송 캡처
그러나 당시 일본·유럽·미국 유학생들을 겨냥한 공안 간첩 조작 사건들이 횡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재독교포 출신'이라는 단서가 '간첩 설정'과 연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짙다.
JTBC는 입장문에서 '남파간첩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다'는 내용은 없다고 했지만 정확히 남자 주인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간첩 설정은 바뀌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만약 유출 시놉시스와 같은 설정이 강행된다면 이는 각종 간첩 조작 사건 유가족들과 피해자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처사라는 비판이 인다. 관련 재판들도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민주화 운동에 북한 공작이 있다고 믿는 여론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간첩이 운동권 학생으로 위장을 했다'는 설정은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인이나 뒤틀린 애국심을 가진 인물로 등장해 왔던 안기부 요원 설명도 석연치 않다. 지금까지 안기부가 그렇게 묘사된 데는 당시 정권 유지를 위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들을 고문·감시하는 등 비인간적 행위에 적극 가담하고 앞장섰던 전적에 있다.
'설강화' 측은 첫 보도자료를 통해 안기부 1팀장 이강무(장승조 분)는 '원칙주의자이자 대쪽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안기부 요원 장한나(정유진 분)는 '거침없이 뛰어드는 열정을 가진 인물'로 전했다.
JTBC는 안기부 미화 요소 역시 부인했지만 이 같은 인물 설명에 대해서는 딱히 수정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안기부 기관 전체에 대한 역사의 부정적인 평가를 뒤로 하고, 개개인 삶에 인간적인 서사와 사연을 부여할 것인지 의문을 남긴다.
시청자들은 미디어가 앞장서 안기부 요원 캐릭터를 '평범한 인격체'로 해석하는 것이 당시 안기부 고문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 민주화 운동 투사 천영초씨 이름과 유사한 여자 주인공 은영초(지수 분) 이름, 공개된 촬영장 사진에서 '해방 이화' 문구와 같은 '해방 호수' 현수막 등도 문제가 됐다. '조선구마사' 사례에서 봤듯이, 역사 왜곡 우려가 있는 작품에서 학생 운동에 참여한 실존 인물이나 단체를 연상시키는 요소는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역사적 사건들은 언제나 콘텐츠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설강화'가 추구하는 방향성에는 유독 반발이 심한 것일까. 그동안 콘텐츠들이 민주화 운동 가치와 당시 실화를 전하는 데 집중했던 반면, '설강화'는 그러한 시대 배경을 '블랙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위한 양념 정도로 여긴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여기에 앞선 논란들까지 더해져 치명타를 입은 셈이다.
아직 군사 독재 정권을 벗어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고, 피해자들까지 생존해 있는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지금까지 JTBC가 내놓은 다소 피상적인 해명만으로는 시청자들 마음을 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이들은 역사 왜곡 위험 요소에 대한 완전한 배제, 보다 구체적인 해명 그리고 시청자 의견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구마사' 조기 종영·제작 중단 여파로 방송사 SBS, 제작사 모회사 YG엔터테인먼트 등 시가총액은 일주일 새 716억원이 증발했다. 그 중심에는 광고협찬사·제작지원사·지자체까지 돌아서게 만든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불매 운동이 있었다. 문제 소지를 인지하지 못한 책임 관계자들에게는 호된 질책과 함께 실질적 피해가 따라왔다.
핵심을 짚지 못한 해명은 오히려 불신을 키웠다. 침묵만 지키며 촬영을 강행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연 '설강화'가 제대로 시청자들을 납득시켜 이번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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