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속도' 박혁지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처음에는 체력으로 짐을 버텼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사히 산장까지 전달한다'란 마음이
짐을 떠받치게 되었죠." _영화 '행복의 속도' 중에서
데뷔작 '춘희막이'와 '오 마이 파파'를 통해 사람에 관한 따뜻한 시선을 보였던 박혁지 감독이 세 번째 작품 '행복의 속도'로 돌아왔다. 이번엔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일본 오제에서 묵묵히 짐을 짊어진 채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발자국을 뒤따르며 '행복'을 묻는다.
'행복의 속도'는 매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서 산장까지 배달하는 봇카들의 걸음을 묵묵히 뒤따른다. '빠름'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느긋하기까지 보이는 봇카들의 발걸음은 처음에는 불안함마저 느끼게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속도에 맞춰 눈과 마음이 여유로워짐을 느낀다. 여기에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습원 지대 오제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은 지친 일상을 위로한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 카페에서 박혁지 감독을 만나 어떻게 오제라는 자연 속에서 이름도 낯선 봇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냈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 '행복의 속도'가 개봉했다. GV(관객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소감은 어떤가? 박혁지 감독(이하 박혁지): '나 잘 살고 있나?' '내 속도는 어떻지?' 등의 피드백이 나오고 있는데,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조금은 잘 전달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객분들이 그렇게 먼저 말씀해주셔서 좋다. ▷ '봇카'(도보로 짐을 운반하는 사람)라는 직업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봇카들 중에서도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삶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과정도 듣고 싶다. 박혁지: 2016년 EBS에서 사라져가는 직업을 찍는 다큐를 만들게 돼서 이미지로 검색을 하던 중 높은 짐 하나가 걸렸다. 이걸 추적해나가다 보니 오제라는 곳이 나왔고, '봇카'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 담은 게 '길 위의 인생-인생을 짊어지고'였다. 그렇게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를 알게 됐다.
이시타카는 오사카에서 온 도시 청년이라는 점이 재밌었고, 이가라시는 처음부터 풍기는 인상이 남달라 보였다. 생각하는 깊이도 남다르고, 사람이 멋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오제의 사계절, 방송에 담지 못했던 봇카의 뒷이야기를 알게 됐다. 오제라는 공간의 1년 역시 보고 싶고,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제목인 '행복의 속도'가 인상적이다. '행복'과 '속도'라는 어쩐지 이질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결합해 '빠르게'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속도가 적정한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박혁지: 제목은 EBS 다큐 기획서를 쓸 때 들어 있던 문구다. 어떻게 보면 속도라는 건 상대적인 거다. '행복'이란 단어가 붙었을 때는 더더욱 상대적이 되고, 정답도 없는 거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 두 친구가 걷는 걸 보면, 같은 길을 비슷하나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걷지만 그 안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들이 고된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하든 가족을 위하든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속도란 말이 행복과 부딪히긴 하지만 재밌는 표현 같기도 하고, 속도는 단순히 스피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함의한 단어라 생각한다.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오랜 시간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와 함께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박혁지: 다큐를 하면서 되게 좋았던 순간이 몇 번 있는데, '행복의 속도'는 정말 많았다. 이가라시가 말수가 많지 않고, 먼저 말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어느 날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가라시가 지게를 내리길래, 카메라를 정지하고 트라이포드(세 개의 다리로 만든 삼각형 모양의 지지대)를 들고 그쪽으로 뛰었다. 원래 봇카들은 지게를 내리면 바로 끈을 푼다. 그런데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도착하고 나서야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다큐는 같이 만들어가는 거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고, 나는 계속 선택해서 찍어나가는 거다. 그때 이가라시가 날 신뢰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순간은 정말 잊을 수 없다. 다큐는 내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케미가 이뤄질 때 쾌감 같은 게 있다. 그런 순간들이 되게 좋았다.
▷ 촬영하면서 어렵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 박혁지: 제일 어려운 건 생각보다 하루 투자한 만큼 나오는 분량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초반에는 불안하기도 했다. 어떤 예기치 않은 이야기도 벌어져야 하는데 쓸 만한 컷들이 많지 않았다. 또 이가라시는 워낙 베테랑이고 실수도 없고, 수다스런 친구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조바심을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하루에 이 정도 찍으면 2~3분 컷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촬영했는데, 이가라시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의 결을 만들어갔다. 내가 한 게 생각보다 느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한테 가르쳐준 것 같다.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봇카의 삶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게 오제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오제가 가진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정성스레 담아냈다. 박혁지: 봇카와 오제 둘을 동시에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계절의 변화도 정확히 찍어내야 했고, 그러려면 휘뚜루마뚜루 찍을 수 없었다. 넓은 풀샷부터 클로즈업까지 하루는 오제를 위해 투자했다. 정말 '그때'를 놓치면 그 꽃은 못 찍는 거다. 꽃도, 식생도, 소리도 계절마다 다를 거 같아서 그런 것들을 담아내기 위해 짐벌, 드론 등을 이용해 공들여 찍었다. 바람도 오제의 바람 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녹음기도 많이 썼다. 오제 구경은 정말 잘했다.(웃음)
오제에서는 차를 이용할 수 없어서 많은 장비를 다 짊어지고 다녔다. 주로 3명이 갔는데, 한 명은 짐만 들었다. 차라도 있으면 보관했다가 꺼내 쓸 텐데 그럴 수도 없어서 중간에 짐을 내리고 꺼내고 다시 꾸리고…. 내 욕심이 크면 클수록 나를 비롯한 스태프가 힘들어지는구나, 욕심이 클수록 힘든 건 나라는 것도 배웠다.(웃음)▷ 긴 시간 여러 모습의 오제를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모습이 있을까? 박혁지: 당연히 별이다. 나도 다큐 작업을 하면서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렇게 많은 별을 육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카메라가 직접 볼 때 느낌 100%로 그 모습을 제대로 다 담지 못했다. 별의 일주운동(천체가 천구의 북극과 남극을 잇는 선을 축으로 회전하는 운동)을 담으려면 오랜 시간을 찍어야 한다. 밤에 별을 찍는데 사슴을 만났다. 나와 사슴이 서로 놀랐다.(웃음) 거대한 하늘이 머리 위에 쫙 펼쳐져 있고 산도 있고 정말 너무 멋있었다.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 관객들이 '행복의 속도'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와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떤 생각을 해보길 바라는가?
박혁지: 114분 동안 오제에 가서 쉬다 온 느낌이면 좋겠다. 잠시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자연과 봇카의 삶에 푹 빠져 러닝타임이 지나간 후 '나는 어떻지?'라면서 극장을 나오면 최고로 좋을 거 같다. '난 잘하고 있나?'라며 살짝 갸우뚱 해도 좋다. 그런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고, 후반 작업까지 그런 생각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를 먼저 접한 많은 분이 오제가 버킷리스트가 됐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도 좋을 것 같다. 오제를 찾는 손님이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관광객이 와서 산장을 찾아야 봇카도 필요해진다. 지금 상황이 안 좋긴 한데, 트래킹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오제를 찾으면 좋을 것 같다. 걷다가 실제 주인공들도 만날 수 있다. ▷ 앞으로 스크린을 통해 '행복의 속도' 만나게 될 예비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혁지: 두 시간을 보고 나와서 재밌으면 되고, 그게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라고 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시원한 풍광도 있다. 빠른 컷 전환의 영화에 지친 분들에게는 휴식이 될 수도 있다. 3040에게는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을 영화다. 모든 세대, 특히 젊은 세대가 많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