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방탄소년단의 단독 콘서트를 보러 온 팬들의 모습. 이한형 기자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아이돌 덕질(팬질)을 하는 것은 가능할까. 탈덕(덕질을 그만둠)하지 않은 채로, 서로 공격하기보다는, 자본과 차별의 시스템 변화를 아이돌과 함께 꿈꾸는 팬이라는 이상이 가능할까. "여성 팬덤과 남성 아이돌로 대표 재현되는 아이돌 문화가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성찰이 공론화"(5쪽)된 와중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팬'들의 질문이다.
이달 초 발간된 '페미돌로지'(2022·빨간소금)는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분석하는 아이돌로지, 곧 '아이돌학'(學)이라는 의미다. 류진희 건국대 글로컬캠퍼스 교양대학 교수, 백문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기획했고 총 13명의 페미니스트가 쓴 글을 엮은 결과물이다.
초국적 한류 속에서 이루어지는 걸그룹 노동, 점점 더 공고화되는 소비자-팬덤의 명과 암, 친밀성을 판다는 아이돌 산업의 한계나 위험 요소를 비롯해,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의 손쉽고도 단순한 규정을 넘어 대항 담론을 펼쳐나가는 적극적인 팬덤의 행동, K팝에서 발견되는 남성성의 특징, 여성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한 버닝썬 게이트의 정치경제 분석, 트로트 열풍을 통해 수면 위로 떠 오른 어머님 팬의 존재, 코로나19가 아이돌 판에 미친 영향 등 다채로운 주제가 펼쳐져 있다.
CBS노컷뉴스는 '페미돌로지'의 기획자인 류진희·허윤 교수를 최근 서면 인터뷰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아이돌학을 논한다는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페미돌로지'를 둘러싸고 풍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페미돌로지'의 출발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1월 콜로키움을 시작했으니, 약 2년 4개월 만에 '책'이라는 형태로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기획자들은 '빠순이'라고 하는 폄훼의 시선에서 초기 팬덤 논의가 이루어졌고, 요즘은 한류 열풍과 K팝의 영향력으로 아이돌 산업의 효용 및 팬덤의 긍정성이 부각된 점에 주목했다. 폄훼도 상찬도 아닌 다른 구도를 찾고자 했다.
지난달 25일 출간된 '페미돌로지' 허윤 교수는 "아이돌 산업과 팬덤의 행위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접근을 취하려 했다. 그래서 비교적 새로운 관점을 취하는 논의를 수록하려고 했다. 콜로키움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준비과정에서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BTS 팬덤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나, 트로트 팬덤의 등장, 해외의 K팝 연구 동향 등을 포함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류진희 교수는 "애초 '페미돌로지' 연속 콜로키움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트로트 붐이 책을 준비할 때는 꼭 넣어야 하는 트렌드가 되어서, 이를 반영하느라 기획자들이 필자 섭외부터 애를 썼다"라고 귀띔했다. 그 덕에 장민지 경남대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가 쓴 '미스/터트롯과 여성/중년 팬덤의 탄생'이라는 글이 실릴 수 있었다.
워낙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대중문화의 속성상 책 발간에 맞춰 다루지 못한 주제도 있다. 지난해 8월 시작해 말 그대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렸던 댄스 크루 서바이벌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한 예다. 류 교수는 "이 신드롬을 분석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주 아쉽다"라며 "아이돌+팬덤+산업을 가능케 한 그림자 노동의 주체였던 댄서들이 이 산업의 한 부분을 바꾸어내는 '다른' 아이돌로서 스스로 팬덤을 만들어낸 것, 이는 좀 더 논의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라고 부연했다.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아이돌 문화를 다루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허 교수는 "페미니스트와 아이돌 팬덤은 상충하는 것처럼 여겨졌다"고 운을 뗐다. 덕질 주체의 연령대가 꼭 10대에 한정된 것이 아님에도, 아이돌 팬덤은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어린 여성들'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남성 아이돌을 생각 없이 숭배하는' 존재로 쉽게 치부됐다는 것이다.
그는 "남성 아이돌과 여성 팬의 관계가 '주종' 관계에 가까운 방식으로 상상될 때, (덕질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처음에는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페미니스트 킬 조이'라는 말처럼, 페미니즘은 '재미'가 없고, 미디어를 비판·비평할 줄만 안다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고"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와 아이돌 산업, 팬덤이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과 "왜 페미니스트가 아이돌을 다루는 것이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을 '페미돌로지'의 의의라고 소개했다.
'페미돌로지' 기획자 허윤 교수는 책에 수록하지 못해 아쉬웠던 주제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들었다. 엠넷 제공'페미돌로지'의 저자들이 가장 집중한 주제는 바로 '팬덤'이다. 단순한 수용자로서 인식되었던 과거와 달리 훨씬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팬'이라는 위치의 변화, 1·2세대 팬질과 3세대 이후의 팬질의 양태 비교를 비롯해 팬덤 스스로가 어떤 입장을 자처하고 명분을 내세우는지, 또 아이돌과 팬은 얼마나 다층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K팝의 초국적인 인기 덕에 아이돌 팬이라는 범주는 그저 국내에 거주하는 한국인 팬에 머물지 않는다. 인종·성별·연령의 폭이 넓어진 '글로벌 팬덤' 시대가 도래한 후, 팬들은 수용자를 넘어 기획자, 비평가, 운동가, 큐레이터 등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허 교수는 "여성들이 인력 조직이나 생산 등을 제일 먼저 경험해보는 게 바로 팬덤 활동이라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이 익명으로 집단 시위를 조직하는 방식에서도 팬덤 활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신원과 계정을 빠르게 인증하고 계좌를 열어 돈을 받고 해당 사업을 진행한 후 사라지는 일시적 연대체의 형식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실 저는 이런 식의 '자기 효능감', 팬덤 활동을 통해 경험한 행위성 같은 것이 참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있다. 일부는 적극적인 소비자로서 '소비자 권리'를 주장하게 되고, 일부는 기획자가 되지 않을까. 이런 방식의 다양한 경험이 자신의 역능(empower)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게 한국의 특수성이지 않을까"라고 바라봤다.
학술적 연구와 비평을 하는 연구자이자 팬인 '아카-팬'도 등장했다. BTS의 경우 학제 간 국제 콘퍼런스가 열리고 전 세계의 학자 팬들이 모여 BTS 전문 학술지를 만든다. 또 다른 한편에는 '아미 매거진'이나 '보라색 비전' 같은 팬 잡지를 내고 블로그를 운영하는 팬 연구자가 존재한다. 팬이 연구자로 성장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트위터의 방탄학자 계정(@BangtanScholars) 허 교수는 "분석 대상이 되는 BTS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는 점을 팬 연구자만의 엄청난 장점으로 꼽았다.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읽고 분석해야 하는데 팬은 이미 자발적으로 그 '토대 작업'을 마친 상태라서 유리한 부분이 있다는 설명이다. 팬이기 때문에 좀 더 가치 있는 자료를 쉽게 알아보고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허 교수는 "팬덤 연구처럼 각 팬덤의 성격이 차이가 있고, 행위성도 달라지는 경우에는 특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팬덤 내에서도 정치적인 의제를 드러내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퀴어 프렌들리 한 사람, 퀴어 포비아 한 사람 등 다양한 흐름이 있는데,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눈을 갖는 건 팬덤 내에서 오래 관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서는 '연구자'의 범위를 아주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것으로 한정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해외에서는 '취미로서의 학문'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직업이 따로 있거나, 은퇴 후 본인의 관심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책도 쓰는 '비직업적 연구자'들이다. 그런 연구자들이 많아지면, 전문 연구자들이 다루지 못하는, 보지 못하는 영역까지 함께 고민하면서 연구의 장을 풍성하게 다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카-팬'의 연구에 의구심을 품는 시선도 존재한다. 어쩔 수 없이 '과도한 의미 부여'나 '고평가'를 하게 될 위험이 있지 않냐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 허 교수는 이 같은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팬들의 자발적인 '착즙'은 팬이라서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서도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찰하고 분석하는 대상에서 발견되는 작은 흔적이나 징조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망은 연구자라면 언제나 갖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전했다.
문학 연구자인 본인도 문학 텍스트를 분석하는 도중 '내가 이 지점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언급한 허 교수는 "중요한 것은 이런 '적극적인 해석'을 논의 선상에 올려두고 토론하고, 리뷰하는 공론장이라고 생각한다. 저희 책이 하고자 하는 목표가 이런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강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