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원과 황정민이란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나홍진 감독이 제작한 2016년도 개봉작 '곡성'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후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사건들로 마을이 발칵 뒤집히면서 이를 추적하는 경찰이 직면하는 괴이한 현상들을 담은 영화인데요, 무당과 악마 저주 등 오컬트적인 요소를 절묘하게 버무려 관객들을 충격에 빠지게 한 영화로 악명이 높습니다. 영화 곡성(哭聲)은 영화의 배경이 된 전라남도 곡성(谷城)과 같은 발음의 단어를 제목으로 따와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한껏 연출해 내 한국 공포물의 수작으로 꼽힙니다.
오늘 '법정B컷'이 전해드릴 사건 역시 공교롭게도 전남 곡성군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영화와 같이 악마나 천사, 저주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존하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그 책임을 외면하는 과정은 영화 곡성 못지않게 공포스럽고 잔혹합니다.
진범들의 무고에 성폭행범 된 아버지…딸이 무죄 밝혔다
사건의 발단은 영화 곡성이 개봉하기 1년 전인 2015년 시작됐습니다. 전남 곡성에서 호두과자를 팔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50대 남성 A씨. 그에게는 2015년 12월 30일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연속해서 벌어집니다. 그날 저녁 윗집에 살던 여성 B씨가 술에 취해 다짜고짜 찾아와 "당신이 내 조카를 성폭행했다"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뜬금없는 행패에 A씨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고, B씨는 출동한 경찰에게 계속해 "A씨가 내 조카를 성폭행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A씨에 대한 수사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하루아침에 성폭행 피의자로 조사를 받게 된 A씨는 수사 내내 "B씨의 조카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며 혐의를 부인합니다. 경찰과 검찰 수사 내내 그는 무죄를 주장했고 "고모 B씨와 그의 조카가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지목해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 철저히 조사해 처벌해 달라"라며 무고 혐의로 B씨 등을 역고소합니다.
1년 넘게 조사를 받던 A씨는 2016년 11월 30일 구속됩니다. 전남경찰청과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은 A씨가 2015년 봄부터 겨울까지 지적장애가 있는 B씨의 조카를 집과 모텔 등에서 세 차례 성폭행했고, 자신의 혐의를 숨기기 위해 고모 B씨 등을 무고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렇게 장애인 위계 등 간음과 주거침입, 무고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결국 2017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모든 혐의가 인정돼 징역 6년을 선고받습니다. A씨는 수감 이후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무죄 주장을 증명한 사람은 A씨의 딸이었습니다. 경기도에 살던 딸은 사건이 벌어진 곡성으로 내려가 마을 주민들부터 만나 탐문을 시작했고, 아버지가 구속된 지 약 10개월 만인 2017년 9월, 전남 나주에서 B씨의 조카를 찾아냈습니다.
조카가 딸에게 털어놓은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은 A씨가 아니라 B씨의 남편이자 자신의 고모부인 C씨였다는 겁니다. 이미 남편 C씨의 성폭행 사실을 알고 있었던 B씨가 지적장애를 앓는 조카에게 범인으로 A씨를 지목하라고 계획적으로 교육시켰던 겁니다.
2017.09.21 광주고법 A씨 항소심 재판 中 |
B씨 조카 진술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고모가 A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곡성에서 절 성폭행한 사람은 고모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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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검찰의 수사, 그리고 1심 재판부의 판단을 모두 뒤집는 발언이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가 2017년 9월 29일, A씨의 보석을 허가하면서 A씨는 조건부 석방됐습니다. 1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겁니다.
헛발질 한 검경의 수사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수사당국은 고모부 C씨가 2015년 봄부터 여름까지 자택에서 조카를 3회 성폭행하고, 그해 겨울엔 모텔에서 성폭행했다며 C씨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2018년 9월, C씨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2020년 12월엔 A씨에 대한 무고 혐의도 추가돼 C씨는 징역 3년 6개월, 고모 B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경찰 수사 곳곳서 허점…완벽히 사라진 '무죄추정'
그렇다면 수사당국은 왜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오판을 하게 됐을까요? 지금부터 재판 곳곳에서 드러난 당국의 부실 수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고모 B씨와 고모부 C씨는 앞서 2013년 전남 함평에서도 동네 이웃을 무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도 조카를 성폭행한 사람은 C씨였지만, 이들은 동네 이웃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그때도 조카와 말을 맞췄습니다. 다만 당시 수사당국은 조카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동네 이웃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렸고, B씨와 C씨도 무고로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무고로 처벌 받지 않았던 B씨와 C씨가 이번엔 곡성으로 넘어와 A씨를 표적으로 삼은 겁니다.
그런데 A씨를 수사했던 담당 경찰은 B씨와 C씨가 함평에서 무고 혐의로 조사받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심지어 담당 경찰의 팀장은 당시 함평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었는데 말이죠. 수사팀이 함평 사건을 알았다면, 수사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2020.10.27 서울중앙지법 A씨의 손해배상소송 공판中 |
A씨 변호인 "이전에 함평에서 B씨와 C씨가 이웃을 신고해서 무혐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는데, A씨를 수사할 때는 살펴보지 못했나요?"
경찰 "그렇습니다. 살펴보지 못했던 건입니다"
A씨 변호인 "당시 '함평 사건'을 수사했던 책임자와 'A씨 사건' 책임자가 같은 ○○○ 경위입니다. ○○○ 경위는 함평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증인은 함평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나요?" 경찰 "알았다면 수사방향이 달라졌을 겁니다. 진술 신빙성이 있나, 없나를 당연히 개인적으로 많이 판단했을 텐데, 당시엔 몰랐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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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무고로 조사를 받은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한 경찰은 수사 내내 B씨와 C씨, 그리고 피해자인 조카의 진술을 강하게 믿었습니다. 반면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한 A씨의 진술은 외면했습니다.
피의자와 피해자 진술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지만 'A씨가 차량에 태워 모텔로 끌고 간 뒤 성폭행하고서 마트 앞에 내려줬다'는 피해자 진술에 대한 진위 여부는 확인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A씨의 차량 블랙박스는 물론 모텔과 마트의 CCTV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저장 기간이 지났을 것"이란 이유에서였습니다.
'A씨가 모텔에서 카드로 결제했다'라는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A씨의 카드 결제 내역만 확인했을 뿐 모텔 카드 기기는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만약 모텔의 카드 기기에서 범행 당시 결제된 카드 내역을 조사했다면 진범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A씨측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수사는 오직 A씨의 혐의점을 찾는 것에만 맞춰져 있었습니다. 물론 A씨가 모텔에서 결제한 내역은 없었습니다.
경찰의 이해할 수 없는 수사 방식은 또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여러 사진을 보여주며 범인을 지목하게 하는 '선면 수사' 일정을 B씨에게 미리 알려준 겁니다. B씨가 수사에 앞서 조카에게 미리 '이 사람을 지목하라'며 교육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말이죠.
2020.10.27 서울중앙지법 A씨의 손해배상소송 공판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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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 변호인 "B씨의 조카는 A씨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고 진술했는데, A씨가 어떻게 열쇠를 소지하고 들어온 것인지 또 A씨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추가 조사를 한 적이 있나요?"
경찰 "당연히 열쇠가 없으면 못 들어오는 집인데, 그 부분에 대해선 의구심을 가졌는데 더 이상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피해자 주장이 사실인 것을 입증할 방법도 없고, 반대의 입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피해자가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잘 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식으로 그냥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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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A씨가 범인이라고 경찰이 판단할 근거는 B씨 조카의 진술, 그리고 재판에서 증거 효력이 없는 거짓말 탐지기 결과 정도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A씨의 진술은 거짓으로 나왔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오판을 막기 위해 현대 사법 체계가 마련한 원칙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A씨를 범인으로 판단할 근거는 매우 빈약했지만, 수사당국은 A씨가 범인이란 결론을 내렸고 억울한 시민은 결국 구속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경찰은 재판 내내 이렇게 말합니다.
2020.10.27 서울중앙지법 A씨의 손해배상소송 공판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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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불상인 경우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지만, 이미 피해자(B씨 조카)가 가해자를 지목한 상태에서 수사를 개시하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수사를 하는 것이지, 이 사람이 아닐 것이란 가능성을 두고 수사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피해자 진술에 의존한 채로 수사 방향이 고정돼버린 상태에서 수사를 하다 보니 이런 결과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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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수사에 과실 있다고 보기 어렵다"…싸움은 진행중
연합뉴스1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온 A씨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A씨는 정부를 상대로 2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6월 18일, 서울중앙지법 1심에서 패소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수사 과정에서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수사 기관이 법령,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한계를 위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수사를 했다고 보기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A씨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국가는 손해배상의 요건을 △수사기관의 판단이 경험칙이나 논리칙에 비춰 도저히 그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경우 △공무원이 법규상 또는 조리상 한계를 위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수사방법으로 수사했다는 점이 명백히 입증된 경우 정도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A씨의 딸은 기자와 만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했더니, 이제는 수사 기관의 잘못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A씨 측은 패소 이후 곧장 항소했습니다. 그리고 수사기관의 잘못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인 'A씨 사건 수사기록'과 '함평 사건 수사기록'을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고, 법원은 올해 3월 11일 수사당국인 광주지검 목포지청에 문서 제출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함평 사건 수사기록에 대해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고 성폭력 피해자 보호 등의 관점에서도 부적절하다"라며 법원의 결정을 거부하고 즉시 항고했습니다.
A씨 측은 경찰이 판박이인 함평 사건과 자신들의 사건을 왜 달리 판단했는지, 수사 과정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선 함평 사건 수사 기록이 꼭 제출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손해배상 소송 2심의 두 번째 변론이 다음 달 13일에 잡힌 상황에서 A씨 측은 수사 기록을 하루빨리 받고 싶다는 입장이지만, 문서를 언제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즉시항고 심리가 대법원에서 이뤄지는 점을 고려하면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이 나오긴 어렵습니다.
결국 수사당국의 문서 제출 거부로 인해 손해배상 소송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1년에 걸친 억울한 옥살이, 그로 인해 망가진 삶…하지만 7년째 이어지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한 A씨의 싸움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