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로 '엔데믹'(주기적 발생 감염병)을 맞은 방송계는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제작 현장과 기획사엔 벌써 활기가 돌지만 제작사나 홍보사는 보다 신중하게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큰 맥락에서 방송계는 가요계나 공연계처럼 아예 주된 일거리가 끊기는 사태로는 치닫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산세가 크지 않았던 초반에는 방송 제작 시스템의 특수성이 인정돼 마스크 착용과 밀집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촬영 현장 방역 수칙을 담은 총괄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코로나19로 종영한 예능 프로그램들. 각 방송사 제공이 같은 상황 속에서 2년 간 방송계 코로나19 풍경은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대면 콘셉트' 또는 장소, 방청객 등에 영향을 받는 프로그램들은 콘셉트를 바꾸거나 잠정 폐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한편으로 '비대면 콘셉트' 같은 새로운 포맷이 등장하기도 했다. 미디어 산업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콕'(주로 집에서 생활하는 트렌드)이 급증하면서 국내외 막론하고 OTT 플랫폼이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제작에 참여하는 방송 종사자들 입장에서 코로나19는 때 아닌 재난이었다. 일단 해외 촬영 등이 선택지에서 사라져 제한적 조건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행 및 이웃 방문이 테마였던 '더 짠내투어' '배틀 트립' '한끼줍쇼' 등은 자연스럽게 폐지 수순을 밟았다.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등 장수 음악 예능 프로그램들도 방청객 없이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판정단을 늘려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설상가상, 주요 출연자라도 코로나19에 걸리면 꼼짝 없이 촬영을 '올스톱'하고 모든 '플랜비'를 총동원해 편성 계획에 맞춰야 했다.
최근 종영한 A 드라마 제작진은 "제작 현장에서 주 52시간이 적용된 다음부터 보통 2주~3주 여유를 억지로 만들어서 촬영 일정이 진행된다. 그런데 주연 배우가 차례대로 코로나19에 걸리면 한 사람 당 1주일만 해도 3주가 사라진다"며 "일정이 촉박할 뿐만 아니라 스케줄이 꼬이면서 장소 섭외, 계획된 씬 촬영 등이 다 틀어진다. 그래도 편성대로 가야 하니 작품 품질에도 문제가 생기고, 제작비까지 늘어난다"라고 토로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독립PD협회 제공더욱이 방송사 소속 아닌 종사자들은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며 생계에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2020년 한국독립PD협회가 정회원 306명 중 127명을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답한 회원은 모두 121명이었다. 10개 중 6개 넘는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가 사전 기획 단계에서 취소됐고, 촬영 단계에서 중단된 프로그램도 28.6%에 달했다.
이로 인해 PD들은 '원하지 않은 무급 휴직'(52.4%)이나 '해고 또는 계약 해지'(11.9%) 등 피해를 받았고, '제작 비용에 대한 보상이 없는 계약 파기 또는 취소'를 겪은 비율 역시 26.2%를 기록했다.
결국 코로나19는 방송계에 더욱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코로나 호황'을 누린 업계 안에서 좌초된 프로그램에 얽힌 종사자 개개인은 '코로나 블루'의 그림자를 떠안아야 했다.
쉽지 않은 '대면' 전환의 길…정면돌파 vs 지켜보기
방송계 행사 일정은 서서히 '대면' 전환을 모색 중이다. 지난주만 해도 SLL(구 JTBC스튜디오) 미디어데이, MBC 토일드라마 '지금부터, 쇼타임!' 제작발표회 등이 오프라인으로 치러졌다. 물론, 아직까지 코로나19 감염 확산 우려가 있는 만큼 온라인 생중계도 동시 진행됐다. 일부 기획사들은 배우 인터뷰 역시 온라인 화상 방식을 벗어나 '대면' 진행을 계획 중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이후 대면 제작발표회로 진행된 MBC 토일드라마 '지금부터, 쇼타임!'. MBC 제공일례로 지난 22일 상암동 MBC 사옥에서 열린 '지금부터, 쇼타임!' 제작발표회는 18일부터 거리두기 해제에 따라 좌석 간 띄어앉기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내 공간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따라 KF80 등급 이상의 방역용 마스크를 필수 착용해야 했다. 행사장 내부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식음료 섭취도 불가능했다.
행사장 입장 전, 나름대로 엄격한 방역 지침이 적용됐다. 참가자들에게 발열 체크 후 출입 밴드를 배부했고, 코로나19 증상이 확인될 경우 현장에서 자가진단 키트로 감염 여부를 확인했다.
이런 움직임 한편에는 감염병 등급이 내려가기 전까지 '시기상조'란 우려도 존재한다.
여러 드라마 제작발표회를 앞둔 한 홍보사 관계자는 "상황이 좀 더 지나야 알 수 있지 않겠나. 아직 '대면'을 결정하기엔 부담스럽고, 한다고 해도 온라인과 병행할 수밖에 없다. (감염병 등급이 내려가) 마스크 의무 착용이 풀린 것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확산 여지가 남아 있다. '대면' 기준으로 다 준비했다가 또 크게 확산돼 방역 지침 등이 바뀔 수도 있어 불안하다"라고 짚었다.
촬영 현장 전반 관리 책임이 있는 제작사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다. 확진자 속출에 따른 실질적 피해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당분간은 방역 수칙보다 엄격하게 가지 않을까 싶다. 정부 발표가 나왔어도 사실 더 보수적"이라며 "아직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완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맞춰서 가시적으로 풀어지고 있진 않다. 확진자가 나오면 '올스톱'하는 위험은 여전하다. 없을 경우는 모르지만 (확진자가) 나올 경우엔 검사하면서 촬영이 진행된다"라고 전했다.
이어 "확진자 자가격리 기간 등이 줄어드는 건 정부 지침에 따라 적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작에 지장이 없어야 하니 상황을 봐가면서 할 필요가 있다"며 "가능한 천천히 풀어나갈 예정이고, 워낙 보는 시선이 많아서 욕을 먹거나, 작품 이미지 손상 문제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귀띔했다.
지난 11일 신혼여행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 배우 손예진의 공항 패션 보도자료 사진. 발렌티노(VALENTINO) 제공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은근한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확진자 자가격리 기간만 단축돼도 한숨 돌릴 수 있단 전언이다.
A 드라마 제작진은 "지금은 주 1회 정도로 자가진단 키트로 출연진 및 스태프들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관공서 등 당일에 키트 결과를 요구하는 데도 있어서 그럴 때는 추가 실시하기도 한다. 장소 및 촬영 일정, 각 팀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평균적으로는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 달이 지나 감염병 등급이 내려가면 정부 지침상 자가진단 키트도 사용을 안 하고, 자가격리도 줄어들거나 없어질 거라고 본다. 감기 걸린 것처럼 조금 쉬고 컨디션이 좋아진 후에 나오면 될 거다. 현장은 조금 여유롭게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며 "걸리면 무조건 '일주일 자가격리'가 너무 힘들었다. OTT나 영화와 달리 방송 프로그램은 편성이 딱 정해져 있는 시스템이라 이런 특수성이 반영되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내비쳤다.
배우들은 2년 간 멈췄던 해외 공식 일정을 점차 재개할 전망이다.
한 배우 기획사 관계자는 "아마 해외 화보나 광고 촬영부터 서서히 일정이 풀리지 않을까 싶다. '공항 패션' 촬영 일정도 늘어나고 있다. 일단 준비하기가 쉽다. 드라마나 영화는 촬영 준비도 복잡하고 많은 스태프들이 움직여야 하지만 화보나 광고는 많아야 15명 내외"라면서 "아직 피부에 확 와 닿진 않는데 종방연 등 회식도 재개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내다봤다.
'파고들기'는 CBS노컷뉴스 문화·연예 기자들이 이슈 깊숙한 곳까지 취재한 결과물을 펼치는 코너입니다. 간단명료한 코너명에는 기교나 구실 없이 바르고 곧게 파고들 의지와 용기를 담았습니다. 독자들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통찰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