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중대재해처벌법이 겨우 시행 100일 만에 법 개정 논란을 둘러싸고 군불이 지펴지고 있다.
'모호한 규정'을 비판하는 경영계에 차기 정부는 법령 정비를 약속했지만, 전문가들은 법 취지와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차기 정부, 중대재해법 '손보기' 본격화…시행령 개정 박차 가할 듯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지난 3일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서 산업안전보건 관계법령을 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산업안전보건 관계법령'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최근 시행된 중대재해법을 '저격'한 것으로 읽힌다. 한 인수위 관계자는 "이미 중대재해처벌법과 시행령 개정을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다만 노동계를 자극할 수 있어 에둘러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때가 불과 지난해 1월, 실제 시행된 때는 올해 1월 27일로 6일 현재 시행 100일을 맞았을 뿐이다. 더구나 국회에서 여야 합의까지 거쳐 통과된 중대재해법을 두고 새 정부가 임기 초부터 개정 작업을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회 동의 없이 정부가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는 시행령 개정부터 서두를 것이라는 관측은 이미 널리 퍼져있다.
인수위도 국정과제에서 "법령 개정 등을 통해 현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지침·매뉴얼을 통해 경영자의 안전 및 보건확보 의무을 명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경영계의 요구대로 시행령 조항의 세부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경영계는 관련 보완입법 건의서 및 수정안을 이미 마련해 가까운 시일 안에 제출할 예정이다. 또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도 그동안 배포했던 중대재해법 가이드북과 해설서, 안내서 등을 중심으로 시행령을 '구체화'할 때 필요한 밑그림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使 "CSO 선임했더니 대표이사만 조사…수십 개 넘는 관계법령도 솎아내야"
스마트이미지 제공그동안 경영계는 중대재해법의 법과 시행령 조항이 너무 모호해서 산업안전보건관리체계를 준비하려 해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가운데 경영계가 꼽는 최우선 개선 과제는 최고안전책임자(CSO)의 요건을 명확히 해달라는 주문이다.
현행 중대재해법에는 중대재해법을 위반한 경우 처벌 대상으로 사업주, 경영책임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 때 경영책임자의 하나로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CSO도 해당된다. 하지만 CSO가 안전보건 업무를 전담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업무를 분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대재해법에서 지키도록 한 의무들을 규정하는 안전·보건 관계법령의 범위가 너무 모호하다는 불만도 나온다.
노동부는 지난해 11월 배포한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서를 통해 중대재해법에서 다루는 안전·보건 관계법령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례의 일부일 뿐,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사업장마다 일반적으로 약 30개의 법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경총의 얘기다.
경총 전승태 산업안전팀장은 "중대재해법 수사대상에 오른 기업들을 살펴보면 이미 CSO를 선임했는데도, 고용부가 이를 적법한 경영책임자로 인정하지 않고 대표이사를 불러내 조사하고 있다"며 "경영책임자로서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은 CSO를 처벌해야 하는데, 고용부가 자꾸 다르게 판단한다면 차라리 CSO를 특정할 수 있는 규정을 신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큰 기업들은 사업장에 관해 25개 이상 법령을 지켜야 하는데, 혹시 사고가 났을 때 점검하지 않은 부분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사항을 전부 점검해야 한다"며 "중대재해법과 관련된 법령이 불확실하고, 업종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현장의 혼란과 행정력 손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경영계는 업무나 안전계획을 "충실히 수행"이라고 표현하거나, 수행해야 할 조치나 예산의 수준을 "필요한"이라고 다룬 시행령 조항들도 객관적인 표현으로 수정하라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현실과도, 법 취지와도 동떨어진 주장은 그만…중대재해 예방 취지 살리는 개정 필요해"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영계가 중대재해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고의로 왜곡된 해석을 퍼뜨린다고 반박하고 있다.
우선 중대재해법에서 다루는 산업안전 관계법령의 범위에 대해 정작 관련 수사를 맡고 있는 노동부는 경영계의 주장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해명하고 있다.
노동부 김규석 산재예방감독 정책관은 "지금까지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수사 대상에 올랐던 모든 사업장들이 중대재해법과 함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항으로만 조사를 받았다"며 "실제 대부분 사업장은 산안법만 잘 지켜도 99.9%는 산업재해로 인한 중재재해법 처벌을 피할 수 있다. 모든 사업장이 수십 개의 법령을 동시에 살펴야 한다는 주장은 과도한 얘기"라고 말했다.
노동부가 중대재해법 해설서에서 예로 들었던 10개 법령조차도 광산안전법, 선원법, 항공안전법, 원자력안전법 등 특정 업종, 사업장에서 지켜야 할 법일 뿐, 모든 사업장이 이러한 법령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CSO의 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애초 법의 취지와 체계를 잘못 이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 정책관은 "예를 들어 대표이사, CEO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CSO가 이를 대리한다면 중대재해법 처벌 대상에 해당되겠지만, 평상시라면 사업주, CEO 등을 책임자라고 봐야 한다"며 "이것은 시행령 개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했다.
성신여자대학교 권오성 법학과 교수도 "애초 CSO라는 개념은 우리 법에서 다루지도 않는 개념이다. 법 본문에 적힌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 본래 법이 의도한 중대재해 책임의 주체"라며 "따라서 이 법에서 책임을 묻는 대상은 애초부터 법인의 대표이고, CSO를 둬서 안전과 보건에 대한 대표권의 일부를 하향해 책임을 피한다는 것은 법이 예견하고 있지 않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권 교수는 "법과 시행령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부분에 모호한 면이 있지만, 결국 판례 등으로 구체화하면 될 부분"이라며 "예를 들어 배임죄의 경우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라는 문구 자체는 매우 모호하지만, 판례로 법리가 형성됐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중대재해법 시행에 있어 위와 같은 시행령 조항의 구체화보다 더 시급한 과제가 많은데도 언론을 비롯해 관련 논의들이 과도하게 경영계 요구사항에만 치우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 교수는 "예컨대 법률 3조에 상시 근로자 5명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법을 적용하지 않도록 했는데, 파견 근로자 포함 여부 등 그 기준조차 없지 않느냐"며 "중대재해법을 개정한다면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아 추가하도록 접근해야지, 10만 명 이상 시민들의 청원을 받아 만들어진 법의 취지를 벌써부터 훼손하려는 개정령을 만드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명대학교 강태선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아무리 많은 시행령, 시행규칙을 두더라도 추상적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행정해석과 판례가 있는 것"이라며 "일말의 해석의 여지도 없는 객관적인 법을 만들어달라는 것은 그저 이 법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본부를 외청으로 세우면서 산안법을 적극 개정하는 문제가 실제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더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며 "2024년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면서 반발과 부작용이 상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앞서 산안법과 중대재해법의 역할 조정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