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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 車고장에도 소송만 수년째…법원에 부는 '디스커버리 제도' 바람

법조

    [법정B컷] 車고장에도 소송만 수년째…법원에 부는 '디스커버리 제도' 바람

    편집자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박종민 기자·부산경찰청 제공박종민 기자·부산경찰청 제공
    법원에선 최근 몇 년 간 소비자와 기업 간의 대규모 소송전이 계속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입니다.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사건'과 'BMW 연쇄 화재 사건' 모두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죠.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결함 관련 소규모 소송전도 수두룩합니다.

    저마다 소송 규모도, 내용도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송의 '장기화'입니다.
     
    오늘 법정B컷은 그동안 기업과 개인의 소송전에서 드러난 모습과 한계점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우리나라 법원이 본격 논의에 들어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비 오는 날 시동이 꺼졌다

    치과의사 A씨는 지난 2017년 7월 15일, 전북 군산에서 자신의 폭스바겐 골프 차량을 몰고 있었습니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비가 많이 내렸다는 것이 A씨의 설명입니다. 차를 몰고 가던 A씨는 운전을 시작한 지 5분 정도 지나자 차량 출력이 서서히 저하되더니 시동이 꺼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폭스바겐 서비스센터는 '차량 A필러 안에 있는 선루프 드레인 호스(배수관)가 빠지면서 물이 차량 내부 장치로 흘러 들어갔다'는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쉽게 말해 운전석 쪽 차대 안에 있던 배수관이 빠졌고, 그 틈으로 물이 새 차량 내부장치에 문제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A씨는 차량 결함을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폭스바겐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은 지난해부터 서울중앙지법 제206 민사단독에서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A씨 측의 변호인으로는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사건과 BMW 화재 사고 당시 집단 소송 변론을 맡았던 하종선 변호사가 나섰습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폭스바겐 홈페이지 캡처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폭스바겐 홈페이지 캡처
    먼저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A씨는 지난 2010년 폭스바겐 공식대리점에서 차량을 구매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주행 거리는 약 13만km입니다. 주행거리가 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차가 운행 중 갑자기 시동이 꺼져 버리는 현상을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현재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배수관이 빠지는 현상이 누구의 책임으로 발생했는지입니다. 일단 A씨 측은 자신들은 그동안 폭스바겐 서비스센터에서만 점검을 받았고, 더군다나 A필러는 자신들이 손을 댄 적도 없고, 댈 수도 없는 영역이라며 이번 문제는 폭스바겐 측에 배타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폭스바겐 측은 제조 과정에선 문제가 없고, 차량의 주행거리 등을 고려할 때 운전자 측의 과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또 7년이란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지 자신들은 알 수 없다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나라 현행법상 결함에 대한 1차 입증 책임은 소비자에게 있습니다. 쉽게 말해 사고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비로소 입증 책임이 제조업체로 넘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2010년 생산된 차량의 제조 과정 당시에 실수가 있었음을 소비자가 증명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A씨 측은 이를 증명하겠다며 폭스바겐 측에게 문서 제출과 감정 신청 등을 요구하고 있고, 폭스바겐 측은 관련이 없는 자료들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22.04.04 서울중앙지법 제206 민사단독 A씨 측 준비서면 中
    A씨 측 변호인 : 제조상 결함 주장이 나오면 통상적으로 자동차 제조사들은 문제가 된 차량의 조립공정 기록, 품질확인 기록 및 품질확인 테스트 실시 기록을 제출해 제조상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피고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는 이와 같은 조립공정 기록, 품질확인 기록 및 차량출고 전 살수시험 실시 기록은 전혀 제출하지 않고, 오히려 원고들이 필요한 입증을 충분히 하지 않고 있다고 트집만 잡고 있습니다.


    폭스바겐 측 의견 中
    폭스바겐 측 변호인 :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사건 차량이 정상적으로 사용됐는지, 그리고 제조사의 지배영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맞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입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내가 이 사건 차량을 정상적으로 사용해 왔다', '내가 A필러를 탈거하고 호스 주변에서 작업한 적 없다'는 주장 정도로 이를 인정하기에는 7년 13만km는 너무 긴 시간과 주행거리입니다. (중략)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함의 추정을 인정받기 위해선 그 시간 동안 해당 제품이 정상적으로 사용됐다는 점에 대해 더 적극적인 입증이 필요합니다.

    1차 입증을 소비자가 해야 한다… 소송 장기화 불가피

    위에서 본 것처럼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우리나라는 결함 입증의 1차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 보겠습니다. 지난 2020년 8월 서울중앙지법 제12민사부는 차량 사고로 숨진 피해자 유족이 차량 급발진 문제를 주장하며 BMW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20.08.11 서울중앙지법 제12민사부 BMW 손해배상소송 판결문 中
    재판부 : 제품의 생산과정은 전문가인 제조업자만 알 수 있어 그 제품에 어떠한 결함이 존재했는지,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인지 여부는 일반인으로서는 밝힐 수 없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소비자가 제품 결함과 손해 발생 사이의 인과 관계를 과학적·기술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중략)
    이 사건은 정상적으로 차를 운행하고 있던 상태에서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 아래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 것이고, 결국 자동차 결함으로 인한 사고로 판단돼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법원에서 자동차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로 크게 언론 보도됐지만, 이 사건 역시 운전자 과실을 주장한 BMW코리아에 맞서 피해자 유족 측이 정상 운행 중이었음을 증명했기에 이길 수 있었던 사건입니다.

    당시 유족은 차량에서 문제가 발생한 직후 200km/h의 속도로 300m 이상을 주행했고, 그 와중에도 차선을 바꿔 갓길로 달린 점, 비상등을 켜고서 주변에 위험을 알린 점 등을 증거로 내세워 운전자가 정상 운행 중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참고로 BMW코리아는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고도의 기술과 부품이 집약된 자동차와 같은 제조물의 결함을 소비자가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또 해당 결함이 본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상당수 제조사가 기밀을 이유로 문서 제출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보니 언론과 여론의 시선이 쏠렸던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집단 소송조차 첫 선고가 디젤게이트 발생 4년 뒤에나 나왔습니다. 손해배상 금액 역시 다른 나라와 비교해 터무니 없는 수준인 1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BMW 화재 사고 재판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디스커버리 제도' 논의하는 법원… 완벽한 제도는 없다지만

    고상현 기자고상현 기자
    법원행정처는 지난해부터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법원행정처 김형두 차장과 대한변호사협회 이종엽 회장이 디스커버리 도입에 강하게 힘을 싣고 있습니다.

    '소송 전 증거 수집 제도'로도 불리는 디스커버리는 말 그대로 재판에 앞서 양측이 각자 필요한 자료 등을 상대방과 제 3자에 요구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재판 관련 증거를 요구할 수 있고, 자료가 공개되는 만큼 소송 당사자 간의 '정보 불균형'이 해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료를 내놓지 않거나, 또 보존하지 않고 증거를 인멸할 경우엔 강력히 처벌하고 있어 미국에선 공포의 제도로 통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2019년 4월 벌어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Trade Secrets) 침해' 소송전이었습니다.

    당시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자사 인력을 빼가는 방식으로 기술을 탈취했다고 주장했는데,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 법정에 소송을 냈습니다. 증거 확보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디스커버리가 가능한 미국 법정에 소송을 낸 겁니다.

    그러던 중 2020년 2월, 재판부는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조기 패소' 판결을 내립니다. 이유는 '증거 인멸 행위 적발'이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SK이노베이션의 문서 훼손 행위는 영업비밀 탈취 증거를 숨기기 위한 범행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것이 명백하다"라며 "증거인멸과 포렌식 명령 위반으로 인한 법정 모독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상황에 적합한 법적 제재는 오직 조기패소 판결뿐"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강력한 증거 수집 절차를 통해 정보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 디스커버리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힙니다. 국가나 기업, 의료 단체와 맞서는 개인들의 입장에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재판부 입장에서도 충분한 자료를 통한 충실한 심리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법관은 "임의로 제출하는 서류 이상으로 자료를 받게 되니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일단 변호 비용 상승입니다. 자료 수집 등 변호사의 업무가 늘어나는 만큼 변호사 비용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변호사 업계가 디스커버리 도입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자연스레 경제력 차이로 인한 소송 당사자 간의 증거 수집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자료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만큼 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 사냥꾼, 특허 사냥꾼들의 무분별한 소송도 우려됩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민사 합의 1심 재판에 대한 항소율은 2021년 기준 43.5%에 달합니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1심 재판에 불복해 다시 소송을 걸고 있다는 겁니다. 1991년 기준 32.1% 수준이었던 항소율은 2001년 40%를 돌파하더니 계속해 40%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조계는 그 이유로 "1심 재판에서 증거조사 절차가 충실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법원에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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