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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환율에 치이고, 대기업에 밀려"…K-경제난 속 중소기업의 '절규' (계속) |
경기도 화성 내 한 중소기업인 A사 창고에는 국내 거래처에 납품할 수입품들이 층별로 가득 쌓여 있다. 박창주 기자"환율 때문에 수입단가가 너무 비싸졌는데, 이걸 2년 전 계약한 환율에 맞춰 팔려니까 남는 게 없는 거죠. 족쇄가 따로 없어요."
지난 21일 경기도 화성의 한 산업단지. 중국말을 쓰는 노동자 서너 명과 화물칸이 반쯤 비어있는 트럭 한 대가 지나고 있을 뿐 거리는 대체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20년째 도기로 된 욕실기구를 수입해 국내 건설사에 납품해온 A사의 창고에는 납품할 수입품 상자가 건물 3~4층 높이로 쌓여 있었다.
A사는 요즘 물건을 팔면서도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통상 거래처인 시공사와의 계약을 통해 건물 욕실과 화장실 등에 넣을 물품단가를 준공 1~2년 전 미리 정하는데, 계약 당시 12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올들어 1400원대로 치솟아 수입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환율 차이로 인해 추가 원가비용으로 지불해야 할 돈만 30억 원. 판매가격보다 수입 원가가 더 들면서 팔면 팔수록 적자만 심해지고 있는 처지다.
국내 대기업 건설사 등에 납품할 욕실 기구들. 박창주 기자그렇다고 납품을 중단할 수도 없다. 대기업과의 계약불이행으로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할 수 있는 데다, 업계 관행을 어긴 회사로 낙인찍혀 단골들을 잃을 수도 있어서다.
지금까지는 환차손에 대해 대출금으로 간신히 돌려막기를 해왔지만, 이마저도 한계치에 다다랐다. 유례없는 금리 인상으로 이자부담도 큰데, 그나마 코로나19 지원책으로 중소기업 상환기간을 연장해주던 특례조차 중단된 상태다.
경영총괄을 맡고 있는 임원 최모씨는 "10~20원 정도 환율이 올랐을 땐 건설사에 사정이라도 해볼 수 있었는데 이번엔 너무 단기간에 확 올라 협상도 할 수 없다"며 "입장이 '을'이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할 수밖에 없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떨궜다.
적자 부담에 생산 차질…대기업과 출혈경쟁까지
인근 기저귀·여성용품 제조업체인 B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핵심 원자재인 펄프(식물체 등의 섬유 추출물)를 전량 미국에서 수입해오고 있다. 연간 240톤 물량으로 요양원과 병의원, 일반 판매상 등에 납품한다.
펄프를 수입하기 석 달 전쯤 현지 업체와 거래계약을 맺는 방식인데, 몇 달 사이 환율이 급격히 오르면서 수입단가가 30% 넘게 올라 재료비로 10억 원을 더 지출해야 하는 상황.
기저귀 생산업체인 B사는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자재 값 부담으로 일부 생산라인을 중단한 상태다. 박창주 기자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생산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실정이다. 실제 B사 공장의 일부 생산라인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다. 원가 상승에 따른 적자폭을 줄이려 극약처방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세금부과 기준인 수입액 자체가 늘면서 관세를 비롯한 해상운송비와 물류보관비 등 제반비용들이 덩달아 올라 이중고를 겪고 있다. 운송료가 비싼 부산으로의 직항을 피해 중국을 거쳐 평택, 인천으로 입항하고는 있지만 배송지연이 빈번해 절감효과는 미비하다.
미국에서 수입한 펄프로 제조한 상품들이 창고 가득 쌓여 있는 모습. 박창주 기자이런 상황에서 대기업과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대규모 자본으로 중국 등지에서 생산한 값싼 제품으로 '2+1' 같은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는 대기업에 맞서, 고급화 전략으로 틈새를 노려온 중소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벅찬 현실이다.
B사 대표 이모씨는 "원가가 비싸져도 가격경쟁 때문에 판매가를 올리지도 못해 팔아도 손해가 나는 구조가 돼버렸다"며 "수입 절차에 드는 비용들은 물론 인건비도 올라 공장 돌리는 것 자체가 벅차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대급 경제위기' 고환율 늪에 빠진 중소기업
유례없는 달러 초강세로 국내 경제가 고환율과 고금리 등 복합적인 경제난에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특히 수입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들이 원가 급상승에 따른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3년 6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1400원을 넘어선 지난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류영주 기자26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원·달러(美)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이처럼 원자재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중소기업들은 원가 급등에 따른 매출 하락과 적자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로 환율이 1400원선으로 훌쩍 뛰어넘으면서 기존 우크라이나 사태로 치솟은 물가에 더해 고환율과 고금리 부담까지 떠안게 돼 '삼중고'에 빠진 양상이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연이은 자이언트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P↑)에 이어 앞으로도 긴축 재정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되면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1500원대 환율 전망도 나온다. 1997년 외환사태와 2008년 금융대란 수준의 고환율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환율로 무역수지 적자가 거듭되면서 대외건전성 지표인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추가적인 원화 가치 하락이 우려된다.
이달 21일 오후 부산항 신선대와 감만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9월 들어 20일까지 수출이 1년 전보다 줄어든 반면 수입은 늘면서 무역적자가 25년 만에 6개월 연속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연합뉴스이처럼 고환율의 늪이 깊어질수록 상품, 원자재 등을 수입해 대기업이나 국내 시장에 판매하는 중소기업들은 원가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실태는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6월 수출입 중소기업 508개 업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2022년 하반기 중소기업 수출전망 및 수출입 중소기업 물류애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30.5%의 중소기업들은 고환율에 따른 피해가 있다고 응답했다. 주요 피해 요인으로는 원자재 비용증가(78.1%)와 물류비 부담 심화(43.2%) 등이 꼽혔다.
시화공단에 입점해 있는 수도시설 제조업체인 C사의 경우 원자재를 수입해 만든 상품을 국내·외에 판매하고 있는데 원가 인상으로 완제품 가격도 오르면서 거래처 수주물량이 줄어드는 추세다. 그나마 수출부문에서는 고환율로 일시적 매출액 상승이 있었지만, 원자재 수입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메우지는 못하는 수준이다.
더욱이 이들 중소기업들은 고금리로 인한 대출이자 부담이 가중돼 경영자금을 제대로 운용하기가 힘들어지는가 하면, 인건비 상승과 인재 유출 등에 따른 인력난과 대기업을 상대로 한 출혈경쟁 등으로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조기업 307곳을 조사한 결과 고금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은 61.2%에 달했다.
C사 대표 김모씨는 "동시다발적인 위기다. 업계 전체가 붕괴될 지경이다"라고 하소연했다.
"무역비용 자금 지원…정부 조달 역할도"
전문가들은 수입의존도 높은 업체들을 중심으로 물류비나 절세 등 무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개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앞선 중소기업중앙회의 수출입 중소기업 물류애로 실태조사에서도 정부에서 추진해야 할 과제로 선박확보·운임보조(54.5%), 해외전시회 등 수출 마케팅 지원 확대(54.1%) 등이 제안됐다.
강성호 경기도수출기업협회 수석부회장은 "환율을 당장 관에서 조율하기 힘드니 선적비용 지원규모를 확대하거나 조건에 맞는 해외바이어를 적극 유치를 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박람회를 연계해줘야 한다"며 "관세 조정이나 저리융자 강화 등도 시급한 사안이다"라고 조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 정책비전 발표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이다. 윤창원 기자이와 함께 중소기업 수출입과 영업 활동에 필요한 원자재 수급 정보를 선제적으로 제공하고, 정부 차원에서 필수원자재를 저렴한 가격에 조달해주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뒤따른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원자재 수급 정보를 중소기업에 미리 알려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며 "환율에 대한 국가의 시장 개입보다는 경영과 조달 부분에서 지원하는 게 효과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특정 국가에서만 수입할 수 있는 한정된 원자재에 대해서는 정부가 비축한 물량을 조달청을 통해 중소기업에 우선적으로 저렴하게 공급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