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cctv 캡처중국 공산당이 23일 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를 열어 중앙정치국 위원과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선출하고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조직 구성을 마무리하고 산회했다. 이로써 2027년까지 향후 5년간 당을 이끌 지도부 구성이 완료됐다.
시진핑 주석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위원회 총서기,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세 개 요직을 모두 차지했다. 당초 예견됐던 일이다.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가주석직도 3연임할 것이 확실시 된다.
시 주석은 1953년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원적은 산시성 푸핑현이다. 아버지는 부총리를 지낸 쉬준신이다. 한때 소설 류스단 사건으로 실각했다가 덩샤오핑 시대에 복권돼 개혁개방의 최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시 주석도 아버지 실각 여파로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으로 내려가야(하방) 했다. 1974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79년 칭화대를 졸업하자 마자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에서 일했다. 1년전 복권된 아버지의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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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2007년까지는 푸젠성과 저장성에서 현장경험을 쌓았다. 49세 되던 2002년에 당 중앙위원에 선출됐고 2007년에 상하이시 당서기로 재직할 당지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라 중앙서기처 서기직을 역임했다.
2008년 전인대에서 부총리에 올랐고 2013년 18차 당대회를 통해 당 총서기 겸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됐고 이듬해에는 국가주석으로도 뽑혔다.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 겸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연임했고 이듬해 국가주석직에도 연임됐다.
2019년 홍콩 민주화시위에 대한 단호한 진압을 주문했고 이듬해에는 홍콩보안법을 시행한데 이어 2021년에는 '애국자가 통치하는 홍콩' 원칙을 천명해 홍콩 선거제도 개혁을 이끌었다.
2019년말 중국 우한 지역에서 시작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꿔 강력한 방역과 홍콩민주화 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으로 3연임의 초석을 다졌다.
상하이 봉쇄 책임자 리창…차기 총리는 떼어 놓은 당상
20기 공산당 지도부에서 서열 2위와 3위에 오른 리창과 자오러지. 김성기 기자코로나로 인해 코너에 몰렸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또 있으니 리창 상하이시 당서기다. 시진핑 주석에 이어 당 서열 2위에 오름으로써 물러나는 리커창 총리의 후임으로 사실상 예약됐다.
리창은 시 주석의 저장성 근무 시절 핵심 부하 인맥인 '즈장신쥔'(之江新軍)의 일원으로, 시 주석 핵심 측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저장성 출신인 그는 시 주석이 2002~2007년 저장성 성장과 당 서기를 지낼 당시 비서실장 격인 저장성 당위원회 판공청 주임을 맡으면서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된다.
특히 시 주석이 2007년 상하이 당 서기에 이어 201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오르자 리창은 저장성 성장, 장쑤성 당 서기 등 핵심 지역의 요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중국 권력 서열 25위권의 정치국에 입성하고 상하이시 당서기로 영전하자 전문가들은 그의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을 예상했다.
그러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올해 3월부터 상하이에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부터다. 상하이시는 코로나 확산세가 계속되자 3월 28일부터 도시를 2단계로 봉쇄하고 주민 전수 핵산검사를 실시한다고 밝혔지만 도시 봉쇄는 두 달 간 계속됐다.
봉쇄가 길어지면서 성난 주민들이 리창 서기에게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고 세계적인 공급망 대란이 초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상하이는 중국에서 보기드문 코로나19 표적 방역으로 중국의 방역이 나아갈 방향으로 주목을 받았고 국제사회도 평가를 받았다.
리 총리가 역사에 길이 남을 '상하이 봉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2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시 주석의 비서장이라는 경력에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 상하이를 이끈 경험이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19기에서 살아남은 2人…반부패 선봉장 자오러지, 당 이론가 왕후닝
서열 3위에 오른 자오러지는 19기 당 중앙에서 기율검사위원회 주석을 맡아 시 주석의 반부패 드라이브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전인대 의장(상무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자오러지에 이어 정협(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에 오를 것이 확실시 되는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에게 발탁돼, 후진타오 시절과 시진핑 시대까지, 최고 지도자 세 명의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보좌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로 꼽힌다.
1985년 30살의 나이에 푸단대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1986년 무렵 왕후닝은 중국 사상계에서 '신권위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의 제갈량' '중국의 키신저' 등으로 불린다.
적자 생존, 문고리, 선대 인연…지도부이면서 가신그룹
차이치. 바이두 캡처당 서열 5위에 오른 차이치는 수도 베이징시 당서기로 역시 시 주석의 측근으로 통한다. 저장성과 함께 시 주석의 또 다른 정치 기반 중 한 곳인 푸젠성 출신으로 푸젠성에서 11년간 근무한 뒤 2002년 저장성으로 옮겨갔다. 시 주석의 이동 경로와 같다.
2016년 베이징 시장에 발탁됐을 때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나 후보위원도 아니어서 화제가 됐다. 그해 10월 말 베이징 대리시장으로 승진한 뒤 2017년 1월 정식 시장에 선출됐고 이후 5월에 당 서기로 초고속 승진했다.
그는 2017년 10월 시 주석을 향해 "영명한 영수"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시 주석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을 보여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이번 20차 당 대회 개·폐막식에서 시 주석의 연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적은 사람이 차이치였다고 전했다.
차기 총리로 사실상 내정된 리창 상하이시 당서기가 시 주석의 저장성 당서기 시절 비서실장이었다면 이번에 6위로 상무위원에 진입한 딩쉐샹은 시 주석의 상하이시 당서기 시절의 당위원회 비서장 경력이 결정적 지렛대가 됐다.
장쑤성 난통에서 태어난 그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상하이시 비서장, 상하이시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2007년 3~10월 상하이시 1인자(당 서기)였던 시 주석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시 주석 집권 원년인 2013년 시 주석의 부름을 받아 중앙 판공청 부주임 겸 국가 주석 판공실 주임으로 부임했고, 2017년 19차 당 대회를 거쳐 중국 지도부인 중앙정치국(25명) 위원 겸 중앙 서기처 서기로 승진했다.
시 주석 집권 기간 시 주석의 국내외 방문, 중요한 온라인 정상회담 등의 배석자 명단에 거의 빠지지 않아 시진핑의 '문고리 권력' 또는 '그림자'로 불린다. 관례대로라면 한정 상무 부총리 자리를 잇게 된다.
리시 광둥성 서기는 서열 7위로 당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 선출됐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핵심 국내 어젠다인 반부패 드라이브의 선봉에 서게 됐다. 9천6백만 공산당원은 물론 모든 공무원과 국유기업 종사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간쑤성 근무 시절 시진핑 주석 아버지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동료인 리쯔치 전 간쑤성 서기의 비서를 지낸 것이 그의 출세길을 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시 주석이 30대 초반이었을 때부터 시 주석 측근 그룹의 일원으로 꼽혔다.
2017년 10월 19차 당 대회를 통해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국에서 역내총생산 1위인 개혁·개방 1번지 광둥성의 1인자(당 서기)를 맡아 최고 지도부로 가는 최종 검증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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