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알뜨르 비행장 모습.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계속) |
"올레길을 걷고 있었는데, 여기가 일제강점기 당시 비행장이었나요?"
지난 4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에서 만난 노모(57)씨는 '아픈 역사 현장을 둘러본 소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같이 되물었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가족과 함께 여행 왔다는 그는 "역사적인 장소라면 좀 더 알리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아무도 모를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올레길 10코스 중 일부 구간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는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현장이자, 4‧3 학살터, 한국전쟁 훈련소 등 한국 근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역사의 층을 이루며 축적된 곳이다.
"죽지 않으니깐 살뿐" 지옥의 일제 강제노역 현장
제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탁 트인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부터 약 20만평 규모의 비행장이 들어섰다. 이후 1937년까지 알뜨르 비행장은 약 40만평으로 확대됐다. 1937년 8월 이후에는 중국 남경을 폭격하기 위해 중간 기착지로 사용하는 등 일제의 군사요충지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부터는 이른바 '결7호 작전'에 따라 비행장과 그 주변이 대대적인 방어를 위한 요새화 작업에 들어갔다. 비행장 부지가 66만평까지 커졌고, 격납고도 38기로 늘렸다. 주변 송악산과 산방산 등지에는 동굴진지와 고사포진지가 지어졌다.
이 과정에서 도내 각지에서 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폭 70m, 길이 1.4㎞에 달하는 활주로와 지금도 남아 있는 격납고 20여기와 고사포진지는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에서 나고 자란 고 문상진(1926년생)씨는 생전에 강제노역을 이렇게 기억했다.
제주 알뜨르 비행장 모습. 밭 사이로 일제 격납고가 보인다. 고상현 기자"비행장에 처음 간 게 17살 때라. 당시 굴삭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큰 비행장인데도 전부 삽하고 곡괭이로 공사했다. 격납고 만들 때는 바다에서 자갈도 갖고 가고 망치로 돌담 부숴가면서 만들었지. 일본놈들 공출에 먹을 것도 없는데 힘들었어. 죽지 않으니깐 살뿐이지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조성윤 명예교수는 "알뜨르 비행장은 3차례에 걸쳐 확장됐다. 제주도 마을마다 주민 몇 명씩 차출돼서 돌아가면서 일했다. 일하다가 죽고 다친 사례가 많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태평양전쟁, 중일전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인 현장"이라고 설명했다.
무고한 주민 희생된 '죽음의 길'…지금은 올레길로
알뜨르 비행장 바로 옆에 있는 섯알오름. 송악산 인근 세 오름 중 서쪽에 위치한 달걀 모양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섯알오름은 4‧3 당시 195명의 주민이 희생된 학살 터다. 지금은 올레길 10코스 중 일부 구간에 속해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4‧3 당시에는 '죽음의 길'이었다.
4‧3 광풍이 제주 전역을 휩쓸고 간 직후이자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이승만 정부는 경남‧부산 지역이 점령될 위기에 놓이자 제주에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진행했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 4‧3 당시 무장대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군경에 밉보이거나 중상모략 등으로 구속된 사람이 많았다. 섯알오름은 그렇게 예비검속된 서부지역 주민 195명이 총살된 곳이다.
제주4·3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고상현 기자학살 이후에는 군인들이 시신 수습을 못하게 했다. 섯알오름 주변으로 까마귀 소리와 유족의 통곡소리가 섞여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6년 만인 1956년 5월 유해 수습이 비로소 이뤄질 수 있었다. 유해의 신원을 구분할 수 없어 유족은 대강의 뼈를 추슬러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지'다. '100여 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다.
알뜨르 비행장 일대는 또 한국전쟁 당시 제1훈련소가 자리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 낙동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긴박한 상황에서 전선에 보낼 군인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군이 비행장 인근에 남겨놓고 떠난 탄약고, 훈련시설 등을 그대로 활용했다.
이날 일제 격납고를 뒤로 밭에서 감자를 심고 있던 김모(87)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일본군 막사를 해병대 막사로 사용했지.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포로수용소랑 사격장도 있었다. 육지 사람들도 많이 와서 여기서 훈련받고 다시 전쟁터로 투입됐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장도영 소장이 훈련 장병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세운 강병대 교회. 고상현 기자 평화대공원 '급물살'…"전쟁의 여러 얼굴 보여줘야"
일제강점기 강제노역부터 4‧3과 한국전쟁의 아픔이 서려 있는 알뜨르 비행장. 제주도는 2005년부터 이곳을 '제주평화대공원'으로 조성하는 내용의 사업을 추진했다. '세계평화의 섬' 지정에 따라 평화실천 17대 사업의 하나로 전쟁 유적을 정비하고 전시관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곳을 소유한 국방부가 제주도의 '무상 양여 요청'에 대해 대체 용지가 없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10년 넘도록 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제주도는 2009년 '알뜨르 비행장 용지를 지역 발전을 위해 제주도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강정 해군기지 기본협약을 바탕으로 무상양여를 꾸준히 요구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지역주민의 땅을 강제 수용한 데다 해방 이후 돌려주지 않고 국방부에 귀속된 점도 강조했다.
제주 송악산에 남아 있는 일제 진지동굴 모습. 고상현 기자
지난해 들어서야 국방부가 알뜨르 비행장 무상사용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사업에 진전을 보이고 있다. 현재 해당 부지를 무상으로 장기 사용하는 방안을 담은 '제주도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의결만 남겨둔 상태다. 국회를 통과하면 실시설계 등 행정절차가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서귀포시 대정읍 주민들이 평화대공원 사업 추진을 위해 힘을 모았다. 지난 3일 대정읍 지역 20개 단체가 '알뜨르-송악산 평화대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특히 지역 사회에서도 '평화대공원 모습은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토론회를 여는 등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여행 왔다는 강정옥(57‧여)씨는 "비행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설명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평화대공원이 조성된다면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강조됐으면 좋겠다. 다시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고증도 하고, 역사적 맥락 등 자세한 설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성윤 명예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은 전쟁에 대해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있다. 이를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꿔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쟁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데까지 가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제주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안 비행기 조형물. 고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