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지혜. 이음해시태그 제공지금까지 서지혜의 선택은 대체로 안전했지만 TV조선 토일드라마 '빨간풍선'만큼은 달랐다. 통속극의 또 다른 대가, 문영남 작가가 집필한 이 드라마는 모두가 시달리는 상대적 박탈감, 그 배 아픈 욕망의 목마름, 그 목마름을 달래려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을 그렸다. 그 중심에는 깊숙이 숨겨둔 욕망을 펼쳐낸 주인공 조은강(서지혜 분)이 있었다.
은강은 그 동안 서지혜가 맡아왔던 매력적인 캐릭터와 거리가 멀었다. 10부터 100까지의 감정을 모두 표출해야 했기에,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없었다. 상대적 박탈감에 뒤틀린 방식으로 욕망하다 끝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런 극단적 감정까지도 내보여야 했다.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쉬운 캐릭터가 아니었고, 그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욕하면서도 그 다음이 궁금해서 보는 드라마'. 통속극 주인공이 오랜만인데도 서지혜는 그 법칙을 충실히 따랐다. 토씨 하나 틀리면 안되는 문영남 작가의 뚝심과 법칙을 존중했다. 그 결과 시청률 3.7%(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동일)로 시작한 '빨간풍선'은 최고 시청률 11.6%로 종영했다. 서늘하면서도 뻔뻔한 민낯, 한편으로 안타까운 은강의 복합적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당연하게도 배우이자 인간 서지혜는 조은강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말투나 분위기는 은강의 그것인데 열심히 달려와 이제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세 작품 연달아 촬영했고, 특히 '빨간풍선'을 찍을 때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스스로 다잡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빨간풍선'은 서지혜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남겼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고, 이제 앞으론 어떤 캐릭터든 할 수 있단 자신감이다.
다음은 서지혜와의 일문일답.
Q 납득 가능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캐릭터다. 어떤 매력이 있어 선택했나A 은강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감춰져 있는 인간적인 욕망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문영남 작가님이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재밌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작가님과 미팅했을 때 0에서 100까지 감정을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 말이 임팩트가 있었다. 그런 것들이 은강이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촬영을 시작하면서는 그 말이 굉장히 무섭게 다가왔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도전해보고 싶단 생각이 제일 많았다.
Q 어떤 부분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지A 정신력으로 많이 버텼다. 초반에 몸이 아팠어서 약도 잘 챙겨 먹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어떻게든 힘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도 힘드니까 마인드 컨트롤을 많이 하면서 정신력으로 버텼던 거 같다. 돌아 보니 길게 한 것 같은데 5개월 안에 20부작을 촬영했더라. 체력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힘들었다. 제 실생활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사랑을 받으면 사람이 예뻐지는데 이번엔 저도 모르게 은강이처럼 되어가고 있더라. 그런 걸 떨쳐 내려고 재밌는 거 찾아 보기도 하고, 쉬는 날에는 저희 집 강아지랑 함께 놀면서 힐링하기도 했다.
배우 서지혜. 이음해시태그 제공Q 사실 아무리 애증 관계라지만 친구의 남편을 빼앗는 설정이었고, 은강이가 너무 속에 담아두는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A 공감은 각자 다르더라. 여러 반응이 있었다. 각자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더라. 저도 가끔씩 연기하면서 '이 감정은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땐 작가님,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최대한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연습이었던 거 같다. 당연히 저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저와는 반대 성향이다. 저는 친구에게 할 말 다하고, 기분 나쁘거나 좋거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편이다. 은강이가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답답했다. 그런 점에서 50% 정도 닮은 거 같다. 제게도 그런 질투심은 있을 수 있고, 또 나도 상대적 박탈감은 느껴봤으니까.
Q 보통 은강이처럼 '불륜' 설정의 역할은 서브 캐릭터인 경우가 많은데A 왜냐하면 주인공은 뭔가 착해야 된다는 관념이 있다. 작가님이 하신 말씀 중에 완전 선도 완전 악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어둔 선을 넘는 경우도 있고, 안 넘는 경우도 있지만 실천을 하지 않을 뿐이란 거다. 그냥 인간 그 자체가 원래 그렇다는 거였다. 은강이 캐릭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극대화해서 보여준 것 같다. 틀을 깨는 것도 있지만 인간의 본능과 욕망, 내면에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는 그런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싶다.
Q 이전에는 금수저, 전문직 등의 배경을 가진 캐릭터를 많이 했다. 은강이처럼 어려운 배경을 가진 역할로 이미지 변신도 생각했나A 거창하게는 아니지만 조금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했다. 다른 배역이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던 순간에 이 작품 제의가 들어왔고 문영남 작가님의 필력이 워낙 유명하시다보니 선택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본 감정선을 따라가면 은강이 캐릭터가 만들어진다는 그런 본질적인 조언들을 많이 해주셨다. '너는 이렇게 자라오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고 알려주셨다. 저도 모를 때는 최대한 지인들에게 물어보는 작업을 많이 했다. 공감을 해서 연기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인데도 욕을 먹는 느낌 같은 요소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줬고 제 나름대로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다음에는 더 재미난 걸 할 것 같다.
배우 서지혜. 이음해시태그 제공Q 절친한 친구였지만 애증 관계로 변하는 한바다 역의 배우 홍수현과 호흡이 무척 중요했겠다A 너무 편안하고 좋았다. 언니와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서, 또 친구라는 설정이라 빠르게 친해졌던 거 같다. 워낙 베테랑이시고, 저보다 훨씬 선배님이라 많이 이끌어주셨다. 서로 캐릭터나 장면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했다. 집중도가 굉장히 높고, 노력파이시다. 10장이 넘어가는 대사를 외워야 하는 정말 힘든 장면이 있었는데 NG 없이 해내시더라. 저희 드라마가 토씨 하나 틀리면 안되는 대본이라 진짜 힘들었을 거다. 모든 배우들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대단해서 박수가 나왔다. 정말 내공이 단단하단 생각을 했다.
Q 권선징악 또는 해피엔딩 결말이라기 보다는 각자 갈 길을 가되, 화해 뉘앙스를 비치며 끝났다A 저 나름대로 은강이가 어떻게 될지 초점을 두고 생각해봤다. 해피엔딩 보다는 각자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했다. 은강이는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입장이다. 궁지에 몰리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지경까지 왔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고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작가님께서 그렇게 잘 마무리를 해주셨다. 제 예상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용서라기보다는 화해이지 않나 싶다. 물론 은강이가 잘못한 부분도 있고 각자 그렇지만 둘의 우정은 누구도 끊어낼 수 없게 끈끈하기에 '화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Q 이런 불륜 관계를 당연히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은 없겠지만 은강이의 심리는 이해가 갔나.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는' 반응도 있었을 것 같은데A 남자를 사랑했다는 초점보다는 잘못된 욕망에 초점을 뒀다. 바다가 남편을 갖고 있으니까 자신도 그 사람을 탐하고, 가지고 싶었던 거다. 마음 속으로는 은강이가 임용을 꼭 합격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길 응원했다. 욕 먹는 반응은 보고 잘 넘기는 편이다. 몰입하니까 그런 말도 해주시는 것 같다. 사실 너무 몰입한 시청자들이 많으면 지나가다 욕 먹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잘 보고 있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시더라. 드라마와 배우는 별개로 판단을 많이 해주시는 것 같다. 소리 지르고 그런 격한 감정이 많았는데 시원할 때도 있었고, 오랜만에 이런 연기를 해서 나름대로 즐겼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렇게 됐다.
배우 서지혜. 이음해시태그 제공Q 1년 동안 세 작품을 하면서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인지
A 맞다. 조금 천천히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 지금은 쉬고 싶은 생각이 강하다. '빨간풍선'을 지나니까 이제 좋은 캐릭터가 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여행 다니고, 친구들 만나고, 운동하고, 늦잠도 자면서 평범한 서지혜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촬영하는 내내 거의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왔다. 그냥 소파에 앉아 있거나 TV를 켜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우리랑 방송 시간이 겹쳐서 못 본 '일타 스캔들'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제 보려고 한다. '아바타 2' 등 밀린 영화도 봐야 한다. 일상을 즐겨야 다음 작품에도 에너지가 쌓여 힘이 되더라. 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에서 빠져나와 서지혜가 되어 있다. 원래 제 목소리 톤이 아닌데 작품 속 대사 톤이면 아직 못 빠져나온 거다. (웃음)
Q 몇년 전 인터뷰 했을 때는 본인이 비혼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한가A 예전에는 계획만 했는데 점점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나한테 줘야 되는 거구나 싶었다. 언젠가 (결혼)하겠지 싶다. 상대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막연한 생각이다. 저희 엄마가 연애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고 한다. 그런데 뭐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결혼한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떻게 하다 보니까 식장에 들어서 있었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인연이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솔직히 일하면 시간이 없으니까 사람 만날 시간도 없다. 저는 일을 하면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친구들도 제가 안 나올 걸 아니까 굳이 연락을 안 한다. 쉬어야 연애도 하고, 사람도 만나는데 그냥 일복이 많았던 거 같다.
Q 조연부터 주연까지 인상적이면서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다. 배우로서 지향점이 있다면A 그런 방향성을 정해둔다고 해도 꼭 거기로 가진 않더라. 변동이 많은 곳이라 그냥 즐기자는 생각에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정말 즐기는 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하면 지치고, 짜증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냥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자고 싶기도 하다. 그 모든 걸 뿌리치고 나가려면 즐겨야 되는 게 맞다. 그게 제 첫 번째 신념이다.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제 바람이지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배우로서 대중 앞에 보여지고 싶은지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