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방송 캡처"왜곡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 헤아려주시기 바란다."
배우 양자경(양쯔충·미셸 여) 수상 소감 왜곡 논란 이후 SBS 보도국이 내놓은 해명이다. 그러나 여전히 SBS 자유게시판은 책임자 징계와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시청자들로 들끓고 있다. 15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는 이와 관련해 467건의 민원이 쇄도했다. 대체 왜 SBS 해명은 논란을 진화하지 못한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지난 13일 SBS '8 뉴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자경의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이하 오스카) 여우주연상 소식을 전하면서 '8 뉴스'는 "다른 이들이 여러분들에게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라고 음성과 자막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소감 원문과는 달랐다. 양자경이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칭 대상이 '여성 여러분(And ladies)'이었기 때문. 실제 KBS, MBC 등 다른 지상파 뉴스에서는 이 부분을 그대로 살려 보도했다. SBS만 유독 '여성 여러분(And ladies)'을 자막뿐 아니라 음성에서도 편집해 지웠다.
단순 자막 실수였다면 오역 정도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장 속 '여성 여러분'이란 단어만 골라 음성까지 들어냈기에, 그 의도를 의심 받게 됐다. 여성배우가 같은 여성의 한계 없는 도전을 응원한 것마저 지워버린 행태가 다분히 '여성 혐오적'이라는 것이다.
양자경 소감의 맥락과 배경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양자경은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 성과를 이뤄냈다. 백인 위주의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거기에 중년 여성배우가 인정 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는 양자경의 정체성 그 자체이며 양자경은 여기에 중점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결국 메시지는 양자경에게 타국 방송사인 SBS 보도를 통해 변질·훼손됐다.
국내외 통계가 입증하듯이 국적·인종을 떠나 중년이 될수록 기회가 많아지는 남성배우들과 달리, 여성배우들은 배역 부족에 시달린다. 거기에 백인 배우들의 입지가 월등한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라면 그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양자경이 오스카 95년 역사상 여우주연상을 탄 첫 아시아계 여성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를 집필한 박정훈 작가는 "양자경은 자신의 수상이 '나를 닮은 소년 소녀(All the little boys and girls who look like me)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의 증거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에는 '그리고 여성분들, 누구도 당신이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And Ladies, don't let anybody tell you you are ever past your prime. Never give up)라고 말한다"라고 짚었다.
이어 "'Boys and Girls'(소년 소녀들)가 왜 'Ladies and Gentleman'(신사 숙녀 여러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건 전자의 '나를 닮은'에서 '인종'에 대한 부분을 말했다면, 후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중년 여성배우'로서 본인과 동료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차별이기 때문"이라며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이야기는 '여성들'이라는 말을 빼면 설명이 안 된다. '(나이가 듦으로서)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을 듣는 것은 주로 남성배우가 아니라 여성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양자경 소감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미국 NPR, CNN 인도네시아 등 외신들도 이번 SBS의 양자경 수상 소감 왜곡 논란을 다뤘다. 양자경 소감에서 '여성'이 삭제된 이유가 한국 사회의 '백래시' 즉 반페미니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NPR 공식 홈페이지 캡처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사 NPR은 '한국의 주요 방송사가 미셸 여(양자경)의 오스카 시상식 연설에서 '레이디스'(Ladies)를 생략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사건은 한국의 젠더 담론을 둘러싼 긴장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이 성차별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주도한 반페미니스트 물결은 여성의 권한 부여에 대한 논의를 낙인 찍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낙인 찍히는 것을 두려워해 여성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고 했다.
SBS 보도국 대응 역시 명쾌하지가 않다. 처음 보도국 측은 일부 언론을 통해 "꼭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해당 단어를 삭제했다"고 사유를 밝혔다. 이로 인해 비판이 거세지자 기사에서 이 해명은 사라졌다.
대신 14일 오후쯤 문제가 된 보도의 유튜브 영상을 교체하고 "기자가 기사를 발제한 취지와 리포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해당 배우가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차별의 벽'을 넘어 성취를 이룬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왜곡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 헤아려주시기 바란다"며 "'여성 여러분'(And ladies)이라는 말이 갖는 함의가 있기에 디지털 콘텐츠를 모두 수정했다. 앞으로 인터뷰이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게 더 신중을 기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전했다.
시청자들이 요구했던 '여성 여러분'의 편집 사유는 물론이고, 책임자 사과조차 없었다. 과거 SBS는 각종 혐오가 생산된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이미지를 다수 사용해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에도 최소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 정도는 공식 입장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CBS노컷뉴스는 첫 해명 삭제 및 '여성 여러분'의 편집 사유와 관련해 SBS 측에 추가 문의했으나 기존 입장 외에 답변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양자경 수상 소감 왜곡 문제는 보도 신뢰성 훼손 측면에서 '일베' 논란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자의적 판단에 따른 지상파 방송사의 여성 혐오·성차별적 검열이기 때문이다. 첫 해명대로라면 SBS 보도국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발화자의 의도와 달리 짜깁기 하는 행위를 용납한 셈이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차후 다른 보도에 있어 이런 검열이 가능하단 불신이 생겼다.
SBS 해명처럼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차별의 벽'을 넘어 성취를 이룬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보도였다면 '여성'을 향한 양자경의 격려와 응원은 제대로 전달됐어야 했다. 설사 그런 의미의 보도였더라도 '여성'이란 단어만 골라 삭제까지 하면서 이미 진정성을 알 수 없게 됐다. 양자경과 메시지에 대한 존중은커녕, 이해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어떤 연예인의 변명과 같이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SBS 보도 덕분에 양자경 소감이 가진 의의는 더 명확해졌다. '여성'이 이토록 지워지기 쉬운 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그 격려와 응원이 얼마나 절실한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