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공영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옛 제주시청사.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⑥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 ⑦4·3으로 초토화 된 제주 중산간 마을…뿌리 내린 사랑 ⑧제주 최초 철골 건물 시민회관…허물어져도 기억은 유지 ⑨보존계획 세워놓고 철거…사라진 제주 근대 도시의 얼굴 (계속)
|
"우리 남편이 징수계 공무원이었거든. 그때는 옛 시청 일대가 사람들로 북적였지."
6일 제주시 삼도2동 마을회관에서 만난 고모(96) 할머니는 옛 제주시청사에 대해 묻자 이같이 기억했다. 인근 관덕정 옆에 서있던 옛 제주시청사는 제주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 방치되다 2012년 12월 철거됐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제주 최초의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
옛 제주시청사의 역사는 한국전쟁과 4‧3이 끝난 혼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읍은 1955년 9월 1일 제주시로 승격했다. 제주시는 1958년 6월 8일 청사 신축을 결정하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근대 건축가인 박진후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이듬해 10월 16일 2층 규모의 건물로 준공됐다.
이곳 인근은 조선시대부터 제주목관아가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세무서, 경찰서 등이 모여 있는 제주의 정치 행정 중심지였다. 지금은 쇠락한 도심으로 변했지만, 과거 번화가였던 곳이다.
옛 제주시청사는 제주 최초의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중앙에 출입구를 두고 좌우 대칭 형식을 갖춘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이었다. 건물 지붕은 목조 트러스 구조의 모임지붕(추녀마루로만 구성되고 용마루 없이 하나의 꼭짓점에서 지붕골이 만나는 형태)이었다.
옛 제주시청사 모습. 제주시청 사진집 '기억의 저편' 발췌시멘트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벽의 특성상 옆으로 긴 창을 만들 수 없어 수직 창을 뒀다. 중앙 출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홀을 중심으로 사무공간이 좌우로 배치됐다. 홀 중앙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2층도 1층과 마찬가지로 사무실들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시 삼도2동에서 나고 자랐다는 송홍숙(85) 할머니는 "어렸을 때 옛 시청사에서 급사로 일해서 공무원들 심부름을 했었거든. 건물이 참 보기 좋았어. 지붕은 기와가 깔려 있어서 궁궐 같았지. 마당도 엄청 넓었어. 계단 중간에 유리창이 크게 있어서 따뜻한 햇살이 들어왔었지"라고 기억했다.
보존계획 수립해 놓고 허무하게 철거
옛 제주시청사는 1980년 3월 지금의 제주시청사(옛 제주도청사)로 옮기면서 텅 비게 됐다. 급기야 1988년 한 재일동포에게 건물과 부지 소유권이 넘어간 뒤 수십 년간 방치됐다.
40여 년 전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에서 삼도2동으로 이사 왔다는 박윤자(84) 할머니는 "제주시청을 지금 청사로 옮기게 된 이후로 사용을 잘 안 했지. 묵은 건물이니깐 벽 위로 담쟁이들이 막 올라갔었어. 집을 썩게 놔두니깐 잡풀도 무성하고 그랬었어. 결국 건물을 허물어버렸지"라고 말했다.
보존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내 건축학계와 문화계에서 옛 제주시청사에 대해 행정이 매입해 보존하고 활용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제주시는 사유지라는 이유로 손 놓고 있다가 소유주의 요구로 2012년 12월 건물을 철거해버렸다.
지난 2012년 12월 옛 제주시청사 철거 모습. 특히 그 전해인 2011년 제주시가 용역을 의뢰해 수립한 <제주목관아 보존‧관리 및 활용계획>에는 '옛 제주시청사가 당시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고 시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공건축물인 만큼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현 제주시청사가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철거 이후 대응도 이상하다. 건물이 남아 있을 때는 매입 시도조차 안 하다가 건물이 철거된 이후 소유주에게 20억여 원을 주고 부지를 사들여 차량 100대를 세울 수 있는 공영주차장을 조성한 것이다.
이 사안을 취재했던 김영하 전 제이누리 기자는 "옛 건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허물어버리는 것보다는 역사적으로 보존해야 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 건물을 매입해서 보존할 수 있었다. 허물어지도록 놔뒀다는 것은 행정의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놓고 주차장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제주 원도심엔 100년 역사가 없다"
수십 년간 그 자리를 지켰던 옛 제주시청사는 철거 작업이 시작된 지 한 달여 만에 허물어졌다.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옛 제주시청사 모습은 이제는 흑백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살았던 시대상과 사람들의 삶이 담긴 근대건축물에 대해 안이했던 행정의 결과다.
옛 제주시청사 내부 모습. 제주시청 사진집 '기억의 저편' 발췌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경훈 작가는 "건축물은 기억의 공간이자 도시의 역사를 상징한다. 시대상이 담긴 건축물이 있음으로써 도시의 인문학이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제주시 원도심은 최근 100년의 역사가 없다. 다 허물어버려서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근대 건축물에 대해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개발이 곧 땅값과 집값을 올린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이러한 욕망이 옛 제주시청사와 같은 행정 행태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늘 새 건물만 존재하는 '영화 세트장' 같은 웃기는 도시가 돼버린다"고 지적했다.
박 작가는 "선대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도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도시에도 얼굴이 있는 거다. 얼굴 없는 도시는 의미가 없다. 관광객이 찾을 가치가 없는 도시가 돼버린다. 원도심의 역사가 천 년인데, 50년밖에 안 되는 도시가 우리 앞에 있다. 슬픈 일"이라고 강조했다.
옛 제주시청사 모습. '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