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제공정부가 아무래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로 한 것 같다.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 의혹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통령실은 11일 공식 입장을 통해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했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었다. 다만 대통령실은 "청와대 시절과 달리 현재는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도청을 통해 생산된 문건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판에 이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믿으라니 좀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인가. 대통령실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고도 했다. 실체는 있지만 가짜라고 하며 가치를 부정한 것이다.
이는 인식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교묘한 논리다. 얼핏 보면 문건이 위조됐으니 도청 사실도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건 위조와 도청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
오히려 위조 문건은 도청을 통해 생산된 '진짜' 문건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어느 정도 위조됐을지언정 이 문건은 도청의 산물로 보는 게 보다 합리적 추론이지 않을까.
'상당수 위조'라는 대통령실 주장은 적어도 일부는 '진품'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불편한 얘기지만 그 진품이 도청 없이 만들어질 수는 없다.
황진환 기자결국 대통령실은 9줄짜리 짧은 입장문에서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과 '문건의 상당수는 위조'(일부는 진품)라는 모순되는 주장을 동시에 펴고 있다.
정부의 이런 태세 전환이 마뜩잖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은 이번 도청 의혹 사건의 피해자다. 그런데도 이로 인해 한미동맹에 금이라도 갈까 도리어 전전긍긍하는 인상을 숨길 수가 없다.
11일 한미 국방장관 전화통화만 해도 그렇다. 국방부는 미국 측이 '최근 미국의 군사기밀 누출 언론보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고 했다.
한국에 대한 도청 의혹은 졸지에 사라지고 미국의 군사기밀 누출만 부각되면서 대체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헷갈리는 대목이다.
미국 내 기밀누출 경위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도청 사실 등에 대한 확인이 최우선이어야 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물론 정부가 '용산 대통령실 이전' 때문에 도청 사건이 벌어졌다는 야당 공세를 반박하는 것은 일부 정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만 윽박 지르고 정작 따져야 할 미국에는 저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당당한 글로벌 중추국가를 표방한다면 그 반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