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진화도 전에 예산 정쟁…이재민에 부끄럽지 않나[기자수첩]
"각 부처 재난재해 대책비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9270억원 있는데, 이 중에 행정안전부가 3700억원을 쓸 수 있고 산림청에서 1천억원이 편성돼 있습니다."
"부처별 재난재해비 9270억 원 중 즉각 투입 가능한 예산은 1998억 원에 불과합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가져온 영남 산불이 한창이던 28일, 때 아닌 재난대응용 예산 책임론이 여의도에 강하게 휘몰아쳤다.
한 쪽은 재난대응용 예산이 있는데 정부가 쓰지 않은 것이라고, 다른 한 쪽은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예산을 깎아서 쓰지 못한 것이라고 각각 외치고 있다.
영남을 휩쓴 이번 산불과 같은 재난을 효율적으로 이겨내려면 관련 예산 마련은 필수적이다. 선제적 예방은 물론, 사안이 일어난 후의 사후 대응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화재가 여전히 국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인데, 네 잘못이 크니, 네 잘못이 더 크니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화재에 집을 잃은 분들, 가족을 잃은 분들 앞에 불을 끌 예산을 누가 줄였는지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정치권은 이미 화재 늑장대응으로 비판을 자초했다. 불은 지난 22일 발생했지만, 정부와 함께 재난에 대응해야 할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막아보겠다며 지난 주말부터 돌아가면서 헌법재판소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같은 기간 더불어민주당은 광화문 앞에 천막당사를 치고 현장에서 지도부 회의를 열었는데, 이 또한 윤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여당은 지난 26일에야 릴레이 시위를 중단하면서 부랴부랴 대응 특위 가동에 나섰고, 같은 날 민주당 의원 수십 명은 영남을 찾아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지원방안 마련에 나서는 대신 공직선거법 2심 재판에 출석한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나려 서울 고등법원에 모이는 단결력을 발휘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 사태로 궐위 중이어서 국가의 리더십이 공백인 상황인데, 정치권이 책임을 지고 어떻게든 이를 채워보기는커녕 한 쪽은 그를 지키겠다고, 다른 한 쪽은 그를 쫓아내겠다고 하느라 민생은 뒤로 미룬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안동시민 65세 이모씨는 "세상이 불바다가 따로 없는데,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명도 와보는 사람이 없느냐"며 "아무리 대통령 탄핵 상황이 중요하다고 해도 국민이 먼저 아닌가"라고 탄식했다.
이재명 대표는 2심 무죄선고 후 고향이자 이번 산불 피해지역인 안동을 찾았다. 체육관에 모인 이재민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넋두리, 살 곳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왜 이제야 왔느냐는 하소연을 털어놨다.
그런데 민주당 정치인 중에는 이마저도 홍보에 활용하려는 듯, 이 대표가 이재민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하시라"고 말한 부분만 발췌해 전파하는 이들이 있다.
천만다행으로 이번 산불의 주불은 28일 오후, 의성에서 발생한 지 149시간 36분, 일수로는 8일 만에 진화가 됐다.
하지만 화마가 휩쓸고 간 물질적, 정신적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이보다 훨씬 긴 시간, 그리고 예산이 필요하다.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은 헌법재판소에 맡겨 두고, 머리를 맞대어 사고 수습과 이재민 지원에 나설 정부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내는 일이다.
어차피 지금도 헌재의 결론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2025.03.29 0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