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서울특별시·서울연구원 주최 열린 87체제 극복을 위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보건복지부를 출입하는 동안 의·정 갈등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느 곳에 사느냐'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겠다는 걸 절감했다. 필수의료 격차야말로 서울공화국이 빚어낸 부작용의 결정체로 보였다. 오죽하면 "서울 사는 게 (이른바) '스펙'"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겠는가.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2일 국회에서 '87체제 극복'을 주제로 연 토론회에서 던진 '지방분권 개헌'이 딱히 신선하진 않았던 이유다. 사실 케케묵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여당 국회의원들은 기자의 생각과는 달랐던 걸까. 토론회가 진행된 국회도서관 대강당은 시작 30분 전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여당 의원만 절반에 가까운 48명이 몰렸다.
"우리 당의 얼굴"(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 "핫(hot)한 분"(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사랑하는 친구"(권성동 원내대표) 등 현장 분위기만 본다면 '선거캠프 출정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지방분권이라는 '주제' 보다 '발화자(스피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오 시장이 지자체장으로서의 경험을 십분 살린 '지방분권 개헌'을 정치권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던진 게 내심 반가웠다.
오 시장이 제시한 분권(分權) 형태는 '5대 강소국 체제'를 통한, 거의 완전한 의미의 지방자치다. 서울 등 수도권을 제외하고 △대구·경북 △부·울·경(부산·울산·경남) △광주·전남 △충청도 등 4개의 초광역 지자체를 만들어 중앙의 권한을 대폭 이양하자는 것이다.
외교·안보·국방만 대통령과 정부가 책임지고, 과세 자주권을 포함한 재정권 등 나머지는 다 넘겨 지자체가 '알아서 하게' 두자는 취지다. 벤치마킹 모델로는 관내 인구가 서울시의 '3분의 2' 정도인 600만임에도 국민 소득은 10만 달러로 한국을 압도하는 싱가포르를 꼽았다.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서울특별시·서울연구원 주최 열린 87체제 극복을 위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사실 서울공화국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 의료뿐 아니라 교육·문화·일자리 '쏠림', 이로 인한 집값의 폭등까지. 지방분권은 사실 더 빨리 언급됐어야 할 중요 의제였다.
합계출산율이 0.7명대로 곤두박질치는 사이, 여러 전문가들은 인구 절벽과 지방 소멸의 주범으로 '수도권 쏠림'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인구학자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엄청난 (자원) 집중"을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는 이상 인구위기·지방소멸 문제는 절대 풀릴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어느 누구도 이 부분을 진정성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우선순위에 있지도 않았다. 지난해 6월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포 당시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빠졌다.
당시 정부는 대도시의 인구집중 완화가 출산율 제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연내 논의해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지난해는 계엄으로 얼룩졌다. 정부의 공언은 공수표로 끝났다.
이 식상한 아이템은 '의지'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대통령직선제 성취란 감격을 안겼던 현행 헌법이 '업데이트' 없이 40년 가까이 묵은 것도 마찬가지다. '삼권분립'을 지향하면서도 행정부 수반(대통령)에게 비대한 권한을 몰아준 헌법을 뜯어고치려면 기득권이 각자의 특권을 내려놔야 한다.
인적 자원과 인프라를 독점해온 수도권과 정부는 자체 지분을 줄여야 하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은 "임기 단축 각오"(권 원내대표)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알면서도 행동은 못한 '불편한 진실'에 가깝다.
반대로 식상한 의제일지언정 상당한 경쟁력이 될 여지가 있다. 올해도 저출산·고령화 및 지방 소멸은 주요 현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대응 논의를 선제적으로 이끌 수 있다.
대통령에만 오롯이 집중된 권력으로 잇따라 터지는 부정부패 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탄핵 국면에서 꽤 스마트한 전략이기도 하다. 여권의 개헌 카드가 '탄핵 방탄용'이란 합리적 의심에 반격하는 효과를 노려볼 수도 있다.
여당의 애초 의도가 뭐였든, 결국 관건은 전략적 선용(善用)과 실천 의지다. 케케묵은 이야기의 반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