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법원전시관에 전시된 박정희 정부의 국가배상법·법원조직법에 대한 위헌 판결문.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헌법이 보장한 기본권 자체의 박탈이므로 (피고 대한민국의) 상고를 기각한다. - 1971.6.22. 국가배상법·법원조직법 위헌 판결문 中"
지난 1968년 군대 내 운전병 과실로 목숨을 잃은 한 장병의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정부는 1·2심의 국가배상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국고 손실 등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 구제를 제한하도록 국가배상법을 개정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졌던 대법원은 위헌 판결을 내며 제동을 걸었다.
사법부가 행정부에 위헌심판권을 행사한 국내 최초 사례다. 독재정권에 맞서 '삼권분립'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상징성이 높이 평가돼 지금도 이 판결문은 대법원 법원전시관에 놓여 있다.
당시 재판에서 정부를 상대로 꼿꼿이 변론에 나선 법조인이 있다. 고(故) 김봉길 변호사다.
박정희에 위헌 판결 안긴 '꼿꼿 변호사'
미국 이주 10년 후 셋째 아들 김률의 캘리포니아 변호사 합격을 기념해 그간 간직했던 법복을 물려주며 기념 사진을 찍은 김봉길 변호사 모습.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19일 CBS 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김씨는 국가배상 축소를 위한 정부 방침에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기 전후로 국가를 상대로 한 여러 배상청구 사건의 변론을 맡아 승소했다.
6·25 전쟁 때 군법무관이었던 그는 전역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주로 군 사고에 따른 사망·부상 장병이나 보상 없이 국가에 토지를 징발당한 사건들을 수임해 배상 판결을 이끌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파병 등을 거쳐 피해를 호소하는 장병과 토지주 등이 늘면서 1960년대 법조계에서는 김씨처럼 국가를 상대로 한 개인권리 구제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송이 잇따르자 재정 부담을 느낀 정부는 1968년 군인에 대한 국가배상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을 입법했다.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더욱이 개정안이 합헌 판결을 받도록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게 대법원을 설득하라는 '특별 지시'를 하는가 하면, 대법원의 위헌 결정 기준을 높이려 법원조직법까지 개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김씨가 맡았던 군 희생자 국가배상 사건의 1971년 상고심에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 박탈'이라는 취지로 위헌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위 '비상입법'에 제동을 건 대가는 혹독했다. 이듬해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뒤집는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 대법원은 위헌심사권을 헌법위원회에 빼앗겼다. 또 유신헌법은 군인, 경찰관 등은 국가에 배상 청구를 못 하도록 규정해 아예 위헌 소지를 없앴다.
국가의 응징은 계속됐다. 위헌 의견을 냈던 대법원 판사 9명 모두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다.
"이미 위에서 결정"…'악질'로 몰린 모범 변호사
김 변호사가 수사관들에 의해 경찰로 연행되고 있는 모습이 담긴 당시 신문기사 지면.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화살은 김씨에게로도 향했다. 위헌 판결 다음 해인 1972년 1월 17일 대통령의 법무부 연두순시에서 "법을 잘 아는 일부 변호사들의 악덕행위를 뿌리 뽑으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
나흘 뒤 TV 뉴스와 주요 일간지에 돌연 김씨가 등장한다. 국가정보원(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의 안가로 불리던 한 호텔방에서 조사를 받고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 등이다. 기사에는 '불법 사익을 취한 악덕 변호사'로 적혀 있다.
그의 사무실 직원이던 최봉섭씨가 먼저 구금돼 조사를 받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최씨 유족은 "쉬쉬하느라 학대 사실을 한참 지나고서야 들었고, 오른 팔을 다쳐 평생 불편을 겪었다"며 "지금은 사망한 뒤라 자세한 증언을 들을 수 없고,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씨와 최씨 유족에 따르면 구금 조사에서 김씨 역시 가혹행위를 당했는데, 조사관이 따귀를 때리고 윽박을 질러 '옥상에 올라갈까'라며 극단 선택마저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적용된 핵심 혐의는 법률사무취급 단속법 위반. 김씨 처남이 법대 졸업 뒤 잠시 사무실에서 일하며 일부 사건들을 소개했던 게 이른바 '불법 사건 브로커' 고용 행위로 지목된 것이다.
조사관들은 "위에서 이미 결정됐다"며 세금포탈과 변호사법 위반 중 선택하라고 김씨에게 혐의를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위기감을 느낀 김씨가 군법무관 시절 자신의 부하였던 당시 법무장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들었다는 "대통령 지시사항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답'이 정해진 수사에 김씨는 혐의를 자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국 탈세·배임·사기·횡령죄 등으로 입건된 또 다른 변호사들을 비롯한 브로커 50여명과 함께 구속기소 돼 유죄(벌금형)를 받았다. 변호사협회를 통해 정직 처분의 징계도 이어졌다.
이때 법무부는 국가배상금 예산이 5억 원인데 대법원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사건들까지 감안해 국가배상액이 110여억 원으로 늘 것으로 추정, 국고 집행에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 '악덕 변호사 근절' 명령 내용과 수사가 진행된 장소 등이 게재된 모습.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김씨에게 법률사무취급 단속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강압적 조사 행위가 있었다면 재심 사유도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서상범 변호사는 "법률사무취급 단속법은 일제 강점기 자격증 없이 이뤄진 변호 활동을 단속하던 규정(조선총독부제령 제5호)을 5·16 군사정변 이후 처벌대상을 변호사로까지 넓힌 것"이라며 "범죄 행위자가 아닌 변호사까지 형사처벌하는 게 과도하다는 측면에서 위헌적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군사정권이 사법부 길들이기를 했던 것처럼 국가배상법, 징발보상법 전문 변호사들을 몰아내기 위해 혐의를 끼워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고 판단했다.
진실 찾는 유족 "명예회복이라도"…조사 결정 '촉각'
국가 위헌 판결이 오히려 정부를 자극해 유신체제로 이어지면서, 법적 대응 의지조차 상실한 김씨는 2년 뒤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사실상 정치적 망명이었다는 게 유가족의 주장이다.
해방·전쟁 후 국가에 헌신한 군인과 나라에 땅을 빼앗겼던 이들에게 '모범 변호사'였지만, 정부에게는 배상 책임을 끈질기게 캐묻는 눈엣가시가 된 결과로 풀이된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육군 법무관 중령으로 제대 하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봉길 변호사.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악질 변호사로 낙인찍힌 데 대해 유족은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사건 발생 50년 만이다.
김씨가 정부에 큰 부담이 되는 존재였고 또 다른 법조인들에 대한 유사 사례 등이 상당 부분 확인된 만큼, 물리적 탄압 여부 등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혀 명예를 되찾겠다는 취지다.
그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 셋째 아들 률(67)씨는 "공권력에 의해 폭행과 잠 안 재우기 등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사기꾼으로 몰려 강직했던 법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게 됐다"며 "정당하게 승소해 얻은 재산들도 몰수 돼 재산권까지 침해당했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부 독립, 국민 기본권 확립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며 "신체적으로 더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한 사무실 서기(최씨)를 포함해 진실 규명을 통한 명예회복이 이제라도 꼭 이뤄지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진상 조사에서는 김씨 등에 대한 수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또 이에 대한 상부 지시 여부나 적용된 혐의가 적정했느냐에 관한 법리적 판단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김광동 위원장 주재로 2기 진실화해위원회 전체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진실화해위원회 제공진실화해위원회는 늦어도 다음 달 안에는 정식 조사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는 "물리적 강압 행위, 고문 등이 있었는지 국정원 등을 통해 사전 확인 중이다"라며 "조사 개시 여부는 조만간 결론 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국정원 등에 요청한 일부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유족 측은 필요한 자료 범위를 보다 구체화해 추가로 정보공개청구 등을 진행할 방침이다.
이에 국정원은 확인 가능한 자료에 대해서는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국정원 측은 서면 입장문을 통해 "추가로 정보공개 청구가 접수되면 그간 해 온 대로 정보공개법 등 관련 법령 절차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