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입구에는 VIP를 위한 안내문이 붙었다. 요약하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고 가라'다. 하지만 문구 하나 하나에는 '동정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오히려 공짜라는 게 부담스럽진 않을까'와 같은 행여나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윤철원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새벽엔 국자 들고, 낮에는 공구함…19년째 '따뜻한 이중생활' ②[르포]"밥이 생명"…굶주린 노숙인들의 '한끼 원정' ③배고픈 이들에게 '천원의 한끼'…행복 나누는 '기운차림식당' ④"'사랑해요' 인사 건네자 눈물…그 모습에 나도 울컥" ⑤[르포]눈물의 도시락 봉사 "꼭 임종 전, 아버지 눈망울 같아서…" ⑥한 끼 원정을 떠나는 아이들…그리고 '선한영향력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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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가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왔었습니다. 경기도에서 두 시간 넘게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서울 홍대앞 파스타전문점 진짜파스타 대표인 오인태씨(38)는 4년 전 그날을 잊지 못한다. 'VIP'가 처음 방문한 날.
'선한 영향력' 4년만에 4천 개…"이 좋은 걸 왜 이제"
"8시 마감인데, 그때쯤 들어왔어요. 저희도 처음이라 좀 당황하긴 했는데 편하게 주문하라고 안내를 해줬던 거 같아요. 잘 먹고 갔는데, 너무 미안했어요. 저희 때문에 너무 멀리 온 거 같아서…. 그때 저희 같은 가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이렇게 멀리 오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 가게의 VIP는 아동급식카드를 가진 결식아동들이다. 당시 아이들에게 지원되는 한 끼 급식 단가가 5천원이란 사실을 알고, 한 끼라도 마음 편하게 먹이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오 대표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함께 하려는 사장님들이 생겨났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도 사장님들은
"이 좋은 걸 진작 시작할 걸,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라며 흔쾌히 동참했다.
오 대표는 "처음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도 잘 몰랐다"며 "대전의 한 사장님한테 '선한 영향력을 전파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단어 자체가 마음을 울려서 '선한 영향력 가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선한 영향력 가게'. 선한영향력가게 사무국 제공몰라서 못 온다는데…"아이들에 문자 한 번만"
'선한 영향력 가게'는 4년만에 4천여 곳으로 늘었다. 하지만 오 대표의 바람처럼 모든 가게가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고 갈 수 있는 곳이 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선한 영향력 가게'들은 홍보 부족을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아이들이 몰라서 못 온다는 얘기다. 아직까지
'선한 영향력 가게'는 소상공인들의 자발적인 집합체로 법적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홍보도 개별 가게들이 직접 알아서 해야 한다.
경기도 수원의 한 한식뷔페 식당 사장님은 "19년부터 시작했는데, 한 번도 (결식아동들이) 안 왔다"며 "잘 몰라서 그러는지, 동네 아이들이 와서 먹어도 되는데 오질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서울 중구에서 돈가스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진만씨(46)도
넉 달 전부터 선한 영향력 가게 회원이 됐지만, 지금까지 가게를 찾은 'VIP'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돈가스 1인분을 포장해 간 게 유일하다"고 했다.
박씨는 "가게에 (선한 영향력 가게) 스티커를 붙여놨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다"며 "(결식)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 가게'라는 게 있다는 것만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췄다.
물론 정부도 지켜보고만 있는 건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부터 '결식아동 급식 업무 표준 매뉴얼'을 통해
'지자체는 아동급식 지원 대상자 및 보호자에게 「선한 영향력 가게」 정보를 제공하여 민관의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적극 안내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려보내고 있다. 이어 '문자, 누리집, 어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정보 제공'이라고 구체적인 실행 방식까지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지자체 대부분은 선한 영향력 가게에 대한 정보를 따로 제공하고 있지 않고 있다. 강제사항도 아닐뿐더러 정작 복지부 역시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한 영향력 가게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서울시의 경우도 가게를 알리는 데는 소극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최근 홍보 요청이 와서 급식카드 앱을 활용할 수 없는 지 검토하고 있다"며 "선한 영향력 가게가 음식점만 있는 게 아니라 급식 업무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KT의 도움으로 선한 영향력 가게의 위치 등을 안내해주는 전용 앱이 최근 출시되면서, 그동안 웹사이트나 서울시스마트맵을 통해서만 가게를 찾을 수 있었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오 대표는 "기업이나 개인 등 민간에서는 뭐라도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을 받기가 너무 힘들다"며
"지자체에 바라는 건 단 하나, '선한 영향력 가게'라는 게 있다는 문자 한 번만 보내달라는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어렸을 때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사장님은 어른이 되어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에게 소중한 한 끼를 선물하고 있다. 그는 "세심한 배려로 한 끼를 위한 원정을 끝내야 한다"고 말한다. 양혁 대표 제공"세심한 배려로, 한 끼 원정 끝내야…"
선한 영향력 가게가 4천 개까지 늘어났지만,
아이들의 한 끼를 위한 '원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서울 강서구에서 닭볶음탕 식당을 운영하는 양혁(36) 대표는 두 달 전부터 '선한 영향력 가게' 회원이 된 이유가 "어렸을 때 기초생활수급자여서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슷한 처지를 경험한 사장님이 하는 식당이여서 일까. 양 대표의 가게에는 많을 때는 일주일에 다섯 명까지 찾을 때도 있고, 두 달 동안 열대여섯 정도가 다녀갔다.
"편하게 먹으라고 해도, 저도 어렸을 때 쉽게 못 가는 가게들이 있었어요. 예민할 때니까. 스스로 동정받고 있다고 느낀다거나, 무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거 자체가 싫을 수 있거든요." 양 대표의 가게에도 멀리서 오는 학생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부담스러워 할까봐 일부러 말도 잘 안 붙이는데, 그 친구는 2주에 한 번씩 올 정도로 얼굴이 익어서 '배고프면 포장해 줄까'하고 물었더니 멀리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관악구에 산다고…." 가게들이 늘어난 만큼 오 대표의 걱정이 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몇몇 몰상식한 가게들이 선한 영향력 가게를 '돈쭐'(돈으로 혼쭐) 등을 노리고 마케팅에 이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다.
오 대표는 "선의라 하더라도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인 만큼 정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며
"'내가 공짜로 밥 주니까, 고마워 해라'는 식으로 대하면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단법인 왜 안 해주나" vs "법적 요건 갖추는 과정일 뿐"
오 대표는
홍보와 교육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단법인이 되면 지자체에 정식으로 홍보 요청도 할 수 있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교육활동도 펼칠 수 있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도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실정이다.
복지부에 벌써 2년째 신청서를 내고 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오 대표는 "(사단법인) 기준안에 걸리는 게 없다. 회원 100명 넘어야 한다고 하는데, 4천명이다. 사무실 있어야 한다고 해서 마련했고, 직원도 둬야 한다해서 두 명 채용했다"며 "해달라는 거 다 해줬는데,
2년 동안 질질 끌고 안 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선한 영향력 가게'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며
"법적 요건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 (반려에)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선한 영향력 가게의 사단법인 승인건은 다음달에도 복지부 심의가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