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 연 금속노조(왼쪽)·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자칫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무시하는 행보로 해석돼 국제사회에서의 '국격'은 물론 '통상' 입지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된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땐…국제사회 약속 무시 '적신호'
그간 대통령실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반대하는 '노란봉투법'이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더라도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맞대응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과 5월에도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문제는 만약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앞서 문재인 정부 시절 비준했던 ILO 핵심협약의 이행 여부를 국제사회로부터 평가받을 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ILO에 가입한 지 30년 만인 2021년 4월 ILO 핵심협약 △29호(강제노동) △87호(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98호(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보호)를 비준했다. 즉, 국내법과 제도를 국제 협약에 부합하도록 개선하겠다고 국제사회와 약속한 것이다.
ILO 핵심협약. 연합뉴스 비록 우리나라가 핵심협약을 비준했지만, 여기에서 끝이 난 일은 아니다. 한국 정부의 비준 협약 이행 여부는 여전히 ILO 감독기구의 심의 대상이다.
ILO 결사의자유위원회 등 감독기구는 회원국 정부가 협약을 위반하는지 판단한다. 오는 11월 ILO 감독기구는 정부와 노사단체가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가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심의할 예정이다.
이는 한국이 유럽연합(EU)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이행과도 연관될 전망이다. 이미 핵심협약 비준 당시에도 EU는 한국 정부가 FTA 규정과 달리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공식적으로 분쟁을 제기해 논란이 일었다.
국회의 ILO 협약 비준동의안 의결 당시 정부도 "ILO 핵심 협약 비준으로 대외적 측면에서는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해 국격 및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하게 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나아가 한-EU FTA 등 노동 조항이 담긴 FTA 관련 분쟁 소지를 줄여 통상 리스크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지난 4~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한-EU FTA 지속가능발전 시민사회포럼'에서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한-EU FTA 13장(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이행 점검에 ILO 감독기구 역할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다시 확인한 바 있다.
민주노총 류미경 국제국장은 지난 20일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노란봉투법은) ILO 결사의자유위원회가 권고했던 사항을 조금이나마 반영했다는 점에서 한 발 나아가는 법안"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협약을 비준하면서 국내법을 협약에 맞춰 나가겠다는 약속을 깡그리 무시하겠다는 표현이라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밝혔다.
류 국장은 "(개정안에서) 사용자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기존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손해배상 가압류에 대해서도 전면 금지가 아닌 가담한 만큼 책임지게 하자는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실 (대통령이) 거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ILO 협약 비준은 국내법이 국제 기준에 못 미치지만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한 것인데, (대통령 거부권 행사는) 뒤로 후퇴도 가능하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라며 "협약을 비준한 나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덧붙였다.
고려대학교 노동전문대학원 김성희 교수는 "OECD 국가 중에서는 ILO 협약 비준도 많이 늦었다"며 "노란봉투법 거부권 행사는 ILO 기본협약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신과 배치되고, 국제적으로 노동 후진국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조법 2·3조 개정안, ILO 협약 이행 '첫걸음'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파업한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과도한 손해배상을 제한하고, 하도급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손해배상·가압류에 억눌리지 않고 단체행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하청·특수고용노동자도 '진짜 사장'과 대화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화물연대 총파업. 류영주 기자 이는 ILO가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 정부에 권고해 온 사항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2일에도 ILO는 한국 정부에 '개입' 공문을 보내 화물연대 총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이 '결사의 자유 침해'라는 점을 명확히 한 바 있다.
당시 ILO 질베르 웅보 사무총장은 공문을 통해 "ILO 감독기구는 업무복귀명령이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간주하고, 평화적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 대해 형사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ILO 공문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한국에서 발효된 87·98호(결사의 자유) 협약에 기반해 이 분쟁을 해결하는데 가이던스(지침)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한국 정부가 결사의 자유 관련 87호·98호 협약을 비준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개입 절차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20일 오후 8시쯤 '윤석열 퇴진'이 적힌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 양형욱 기자 노란봉투법 개정안 역시 모든 노동자가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행사하도록 보장하겠다는 목적으로, 핵심협약 87·98호에 부합한다는 것이 노동계의 평가다. 뒤집어 말하면 윤 대통령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정부가 이미 비준한 핵심협약을 실제로는 이행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대해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노조법 2·3조 개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국노총 류기섭 사무총장은 "윤석열 정부는 국제 기준과 헌법에 위배되는 노조법을 악용해 '불법 파업'과 반헌법적 손해배상 가압류를 양산함으로써 노동권의 핵심인 쟁의권을 무력화하고 있다"며 "헌법에 명시된 노동3권 보장을 위한 첫걸음이 노조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함께한 국제노총(ITUC) 모니나 웡 노동기본권국 아태지역 담당도 "노조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노동법은 1950년대 산업화 초기 직고용 노동자만 있을 때 만들어졌다"며 "수십년이 흘러 파견·하청·특수고용 등 수많은 노동 형태가 생겨났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모든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을 꼭 이번 국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