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제공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연결된 오늘날 수많은 스토리를 소비하고 있지만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은 정작 얼마나 될까.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의 성과주의를 비판했던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새 책 '서사의 위기'를 통해 온종일 자극적인 스토리를 소비하는 현대의 위기를 진단한다.
저자는 반짝하고 사라질 스토리는 그 어떤 삶의 방향도, 의미도 제시하지 못하는 만큼,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전체,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여야 인생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서사의 위기가 한국 사회는 물론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현시대의 문제라는 데서 이 책은 출발한다.
저자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테오도르 아도르노부터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베르톨트 브레히트, 폴 마르, 미하엘 엔데까지 다채로운 인용을 하며 오늘날 현대인에게서 잊혀지고 있는 서사의 의미를 해석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토리에 중독된 현대인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며 "기업에서는 그 자체로 가치 없는 사물에 스토리를 부여해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자극한다"고 꼬집는다.
그의 해법은 '경청'이다. 소설 '모모'를 예로 든 저자는 소설속 주인공 모모가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이끈다며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서사를 회복시킨다고 강조한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새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로 한다."
한병철 지음 | 다산초 | 144쪽
한겨레출판 2023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은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생물, 수천 년 무성한 나무의 생 가운데 이파리 한 장만큼을 빌려 죽을 위기에 처한 단 한 명만 살릴 수 있는, 나무와 인간 사이 '수명 중개인'의 이야기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숲을 이룬 주인이었지만 어느날 나타난 사람에 의해 파괴된 경험을 가진 나무. 인간의 다섯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느날 꼬마 금화와 쌍둥이 남매 목화·목수가 홀린 듯 숲으로 향하고 나무 가지가 부러져 금화를 덮친다. 어른들을 부르러 간 목화가 돌아왔지만 금화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른들은 죄책감으로 고통속에 살아간다.
세상의 중심이자 생명을 상징하는 나무의 힘에 기대 단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난 열여섯 살 소녀 목화의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의미, 나와 가까운 사람, 나의 죽음을 의식하며 신과 인간의 문제를 짚어가는 신화적 판타지다.
저자는 엄청난 수령의 나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악행을, 나약함을, 순수함을, 서로를 돕고 아끼는 모습을, 사랑하고 기도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삶을 다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나무에게 미약하고 순간을 사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 '단 한 명'의 낱낱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풀어낸다.
저자는 책에서 죽은 자들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가 보는 장면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작가의 애정과 위로를 드러내려는 듯 목화의 절실함으로 다가선다.
저자는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고백한다.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