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대산갤러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미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이 그동안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를 불가능하게 했던 여러 '변곡점(hinge point)'을 맞게 되면서 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중국·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고 설명했다.
이 '변곡점'에서 내려진 여러 결정들로 인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더 이상 개발하지 않도록 할 기회를 잃었다는 주장이다. 헤커 박사는 2004년 이래 직접 북한을 7번 방문해 핵시설을 직접 보았고, 2010년에는 평안북도 영변의 핵시설에 있는 고농축우라늄(HEU) 시설의 실체를 세계에 공개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헤커 박사는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열린 '윌리엄 페리 렉처' 특별강연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며 "북한은 1990년대부터 2020년경까지 30년 동안 진정성 있고 진지하게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려 했지만, 외교를 추진하면서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핵개발을 하는 이중경로 정책(dual-track policy)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강연에서 설명한 3가지 '변곡점', 즉 정부 차원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점은 ▲ 2002년 부시 행정부 시절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작된 2차 북핵 위기 ▲ 2009년 오바마 행정부 집권 ▲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까지 모두 3가지다. 그의 이같은 주장을 정리한 책 '핵의 변곡점'은 최근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되기도 했다.
세계적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이삼봉홀에서 열린 특별 초청 강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먼저 첫 번째에 대해 헤커 박사는 "2000년 북미 코뮤니케를 맺으면서 양자관계를 구축할 때 필요로 하는 요소를 모두 넣었는데, 2002년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강경파들이 집권했고 결국 파기까지 하게 됐다"며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주범 중 하나로 지목했다. 당시 그는 미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이었다.
존 볼턴은 자신의 책에서 "항복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며 "북한이 조기에 우라늄 농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합의를 파기할 수 있는 망치가 됐다"고 밝혔다고 헤커 박사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볼턴 등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대화를 원치 않았으며 북한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하며 "기술적으로는 재앙이었다. 북한이 핵시설을 다시 가동하고 핵실험을 하면 어떻게 할지 플랜 B가 없었고, 북한은 실제로 그 방향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세계적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이삼봉홀에서 열린 특별 초청 강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두 번째 '변곡점'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로, 헤커 박사는 오바마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를 주창했지만 정작 북한의 로켓 발사를 보며 '도발과 강탈 그리고 보상의 악순환을 따르고 있고,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시행한 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제재를 통해 북핵 포기를 유도한다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인데, 세월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는 북한에 핵 능력을 키울 시간만 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제재는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가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헤커 박사는 "당시 북한은 이중경로 정책을 시행했고 (비핵화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도 감수했지만 오바마 행정부 동안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며 "원심분리기 시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영변 핵시설을 폐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북한 현지에서 플루토늄을 직접 보았던 사실을 거론하며 "미국에게 이중경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고, 관계 정상화를 원하기 때문에 대화하라는 메시지로 보인다"고도 말했다.
세계적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대산갤러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세 번째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다. 헤커 박사는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미는 아주 기본적 합의를 맺었지만 핵심 요소는 포함돼 있었다"며 "김정은이 원했던 것은 관계 정상화를 문서화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노이에서 김정은은 자신의 외교관과 협상가들에게 사전에 정상회담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트럼프와 직접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실수를 했다"며 "또 미국 쪽에는 제네바 합의를 반대했던 존 볼턴이 트럼프에게 협상 결렬 쪽이 낫다고 강조했고, 당시 트럼프의 탄핵 문제(마이클 코언 청문회) 등 복잡한 상황이 얽혔다"고 설명했다.
당시 하노이에서 협상이 결렬되자 3월 1일(현지시간)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들은 이 회견에서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 건지 이 자리에서 말하기 힘들다"며 "이런 기회마저 다시 오기 힘들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후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8차 노동당 대회 등을 통해 '근본적이고 전략적인 변화'를 추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포기하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 헤커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그 근거로 2022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횟수가 그전보다 매우 크게 증가한 것과 함께 최근에 열린 북러정상회담, 백악관이 북한과 러시아의 무기 거래에 대한 증거를 공개한 점을 들며 "사실이라면 정말로 좋지 않은 소식"이라고 강조했다.
또 "러시아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서 행동하고 있지 않다"며 "북한이 핵 보유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긴 어렵지만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이 전략적으로 움직임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한다"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잃었고, 현재는 그 기회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이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세계적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이삼봉홀에서 열린 특별 초청 강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한편 그는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한국의 핵무장은 좋지 않은 생각(bad idea)이며 한반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며 "지휘통제 측면에서 2명의 지도자가 핵 발사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함께 북핵에 대응할 수 있다"고 이를 비판했다.
또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고도화됨에 따라 균형을 맞추려면 경제발전에 할애해 왔던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며 "북한이 핵 개발을 추구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고도 강조했다.